9화 빨강 색연필
뚝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성수는 발걸음이 무겁다.
빨강색 색연필 때문이다.
4학년이 된 성수는 반에서도 손꼽히는 우등생이다.
선생님은 공부잘하는 몇 명을 불러서 내일은 방과후에 남아서 선생님을 도와 시험지 채점을 하라고 하셨다.
물론 성수도 포함이다.
문제는 채점할 빨강 색연필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거다.
채점하는 애들 속에 꼭 끼고 싶은데 빨강 색연필을 구할 방법이 없다.
아버지는 공부에 꼭 필요한 공책 연필이 아니면 절대로 안사주셨다.
지우개도 반으로 잘라서 은수언니와 반씩 써야만 했다.
학교에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이 있어 사달라고 하면
“필요없어.”
단박에 자르고는 두 번 다시 입을 못열게 하셨다.
부엌 아궁이에 앉아 작대기로 밥이 뜸이 들게 잔불을 두들겼다.
다 꺼진 불도 마구 두드려 부뚜막에 하얗게 재가 올라갔다.
“또 왜그래?”
성수의 심통에 은수언니가 더 걱정이다.
“그러니까 그런건 왜 한다고 나서.”
정내미가 더 떨어진다.
밥상머리 내내 아버지 눈치만 살피던 성수는 자기가 학교에서 얼마나 공부잘하고 인정 받는지 아버지 들으라는 듯 엄마에게 늘어놓는다.
아버지는 갈치 가시 바르기에만 관심이 있다.
“아버지, 그래서 색연필 사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없이 갈치가시를 발라서 연신 입에 넣으신다.
“아버지, 아버지, 내일 색연필을 꼭 가지고 가야해요.”
“필요 없어.”
차가운 소리에 그냥 울어버리고 싶다.
내일 학교에 가서 색연필이 없어서 채점에서 빠져야 한다고는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다.
설거지를 마치고 앞치마에 손을 슥슥 닦고 들어오는 엄마한테 다시 얘기했지만
“아버지가 돈을 주셔야지.”
싫다. 정말 싫다. 아버지도 엄마도 정말 싫다.
“색연필 가지고 왔지?”
영자는 속도 모르고 신나서 묻지만 성수는
“동생 봐야 해서 일찍 가야해. 시간이 없어”
애써 서투르게 둘러댄다.
학교가 가까운 순봉이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섯째 시간 공부가 시작되고 한참 지났는데도 순봉이는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여섯째 시간이 시작될 무렵 얼굴이 벌겋게 된 순봉이가 돌아왔다.
“돼지가 우리 밖으로 나가서 도망다니는 돼지 잡아서 우리에 넣고 오느라 늦었어요.”
순봉이도 우리도 모두 얼굴이 빨개졌다.
순봉이는 부끄러워서.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느라.
순봉이는 공부가 끝나면 바로 가서 고추 널은 거를 걷어야 한다고 채점을 못하고 간다고 했다.
“순봉아, 내가 깜박하고 색연필을 두고 왔는데 혹시 빌려줄 수 있어?”
성수는 앙큼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 대신 아껴써야 해.”
성수는 보물같은 순봉이의 빨강 색연필을 흰 줄을 조심스레 잡아 뜯고 한 칸만 돌돌 돌려가며 매듭을 풀어서 끄트머리를 똑 잘랐다.
빨강 속살이 귀하게 나왔다.
힘주어 채점하면 많이 닳을까,
동그라미 크게 그리면 많이 닳을까
조심조심 아껴서 시험지를 채점했다.
탁탁탁 가지런히 시험지를 모은 다음 반으로 접어서 선생님 책상에 올려놓았다.
순봉이의 색연필을 한참 들여다 본 성수는 공책 끄트머리를 살짝 잘라서 편지를 썼다.
반으로 접은 편지를 순봉이의 책상 속에 빨강색연필과 함께 넣어두었다.
‘순봉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