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성수

3화 맞춤복

by 왕눈이 누님

여름부터 키우낸 배추 수확이 늦게서야 끝났다.

잘 생기고 실한 배추는 내일 새벽에 서울도매시장으로 팔려나간다.

못난이 배추를 거둬들여 엄마는 겨우내 먹을거리를 장만하실 거다.


서울 장에 가시려고 며칠전부터 들뜬 아버지만큼이나 성수도 한껏 들떴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배추를 좋은 값에 팔아오시면 그 돈으로 새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신발과 신발주머니도 사서 내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배춧잎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노릇노릇 구워낸 배추전은 달달하니 그 맛이 최고다.

넓은 채반 가득 푸짐하게 부쳐 낸 배추전은 기름냄새 만큼이나 잔칫집 분위기다. 말갛게 푼 된장에 마른새우 한 주먹 넣어 팔팔 끓인 배추국에 새우젓 간에 고춧가루 슬쩍 뿌려 버무린 배추겉절이를 곁들여 푸짐하게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지는 큰 트럭에 배추를 가득 싣고 서울 도매시장으로 올라가셨다.


“얼마나 벌어 오실까?”

“내 가방도 신발도 새 옷도 사오시겠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오시겠지?”

막내 두수는 영문도 모른 채 형제자매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눈만 꿈벅꿈벅 손가락만 빨고 있다.


성수는 마당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 본다.

새로 살 가방도 그리고 신발과 신발주머니도 그려본다.

학교에 입고 갈 새 옷도 그려본다.

막대기로 그리고 발바닥으로 지우기를 반복하다 기분이 좋은 성수는 엄마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조잘대고 있다.

“엄마, 서울이 얼마나 멀어?”


저녁때가 되어도 아버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성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지 선물을 기다리는지도 모른채 하염없이 목이 쭈욱 빠지도록 동네어귀를 기웃거린다.

동네 나가서 놀다가 흙투성이가 되어 늦게 돌아온 한수와 남철이만 흘겨보고 곱지 않은 손길로 샘물로 데려가 씻긴다.

‘철 없는 것들.’


“아버지가 늦으시나보다. 방에 들어가서 기다려라.”

엄마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묻어난다.


그날 기다리던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으셨다.

“서울이 얼마나 멀길래......”

이토록 아버지를 기다려 본 적이 없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집에 없는 시간이 더 좋았다.

큰아버지처럼 조합장님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동네에서 존경도 받고 친절하신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집에서 놀면서 왕처럼 지내셨다.

부잣집 막내아들이어서 처자식 밥을 굶기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다.

당신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먹을 시간이고 집안 살림이나 아이들 교육은 뒷전이고 양복에 백구두 차려신고 밖으로만 나다니며 당신 맛난거 먹을거만, 멋진거 입을 거면 챙기는 어른이 한량이셨다.

딸들만 줄줄이라면서 엄마와 딸들을 하찮게 대하시고 종처럼 부리셨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 반년 농사지은 전부, 그것도 당신 손으로 지은 것도 아니고 엄마와 일꾼들이 농사지은 배추 한트럭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틀째 연락이 없으신거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무렵, 향수 냄새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번질번질 처음 보는 항공잠바를 사 입고 손에는 대형라디오를 사서 들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대문을 걸어들어오시는 아버지께 공손히 인사를 하고 저녁상을 다 물려도 아버지는 아버지 라디오와 항공잠바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신게 없었다.

반년 농사지은 일꾼 품삯마져도 없이 빈손이었다.

옆집 미숙이, 영자에게 그렇게 자랑한 학교 갈 가방과 신발, 신발주머니, 그리고 새 옷. 그 어떤것도 없었다.

성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내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또 울었다.


엄마는 그해 겨우내내

책가방 대신 책보를, 그리고 신발주머니를 수를 놓아 만드셨다.

그리고 털실로 새 옷도 떠주셨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맞춤복이라고 이리저리 입혀보시고 옷맵시가 좋으니 뭐를 입혀도 이쁘다고 하얀 이를 드러내시며 좋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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