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그 느낌을 다시 느끼다.
21년 3월, 지역화폐 앱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지역문화재단 광고였다.
6개월간 전문 교육 및 공연의 기회를 준다는 시민 대상 무료 프로그램. 달콤한 꼬임이었다.
이메일로 영상을 제출하고 면접 오디션도 봐야 하는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이라니... 모집 기한도 겨우 2주였다. 어찌 보면 참 불친절한 공고였지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노래, 춤, 연기... 뭐 하나 제대로 배워본 적 없으니 나랏돈으로 뮤지컬이나 한번 배워볼까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오디션 영상을 준비했다.
그때 회사는 이미 사업 종료를 가시화하는지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중지가 되고 신규 프로젝트는 기획 중단되고 있었다.
모집 마감 3일 전. 옷방에 숨어서 노래 두 곡을 부르고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결과물이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게 본 실력이니 어쩌랴.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추가의 말과 함께 재단 담당자에게 영상 첨부한 메일을 전송했다.
3일 후 오후 휴가를 내고 면접 오디션을 보러 문화재단 공연장으로 찾아갔다.
누가 일반시민 대상이라고 했나. 코로나로 공연 기회를 잃은 배우들과 관련 학과 전공자들이 대기 중이다. 5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무대에 올라 오디션을 봐야 한단다. 대작 오디션처럼 간절함이 묻어나는 신기한 광경.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연극 오디션이 끝나고 뮤지컬 오디션 차례. 다양한 사람들의 뽐내기 시간이 지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두꺼운 코트와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민낯으로 무대에 올랐다. 반주 음악도 준비 못하고 무반주 노래 두 곡을 앞부분만 겨우 불렀다. 심사를 보시는 뮤지컬 감독님의 지시에 따라 자녀에게 화내는 연기를 보인 후 객석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시민 대상인데 설마 탈락자가 있을까? 서른 명을 뽑는데 서른두 명이 지원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영상만 보내고 불참한 사람들이 떨어지겠지 혼자 안위하며 집으로 간다. 나중에 알아보니 중복 지원자 등 몇 명 이동 후 전원 합격인 듯.
며칠 후 '합격' 문자를 받는다. 일주일 후부터 수업 시작이란다. 매주 수/토 2시간씩 수업이 진행된다.
직장인이라 토요일 수업만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코로나와 회사 사업 부진 덕분에 휴가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수요일 수업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코로나 덕분에 한동안 온라인 zoom 수업으로 변경되어 서른 명이던 참가자들이 열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하시던 현직 배우들이 거의 다 참여를 못 하게 되었는데, 오디션까지 보면서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그램이 용두사미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알음알음 연락처를 돌려가며 9월 공연까지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설득하였다... 그렇게 열네 명의 정예 멤버로 재정비된다.
혹시 공연 수준이 너무 좋지 않게 되면 시간을 내주신 관객들에게 폐가 될까 하여 지인들을 초대하지도 못했다. 공연 일주일 전부터는 거의 매일 공연장에서 연습했다. 오디션을 보았던 그 공연장이었다.
9월 어느 날.
모집 공고에 강조되었던 그 꿈의 무대.
500석의 공연장이 관객으로 가득 찼다.
오페라, 연극, 뮤지컬, 무용. 네 가지 분야 출연진의 가족과 친구들로 빈자리가 없어서 공연장 분위기가 흠뻑 달아올랐다.
전문가 손길로 헤어, 메이크업을 받고 대여 의상을 입고, 핀 마이크까지 차니 갑자기 아마추어에서 프로 배우로 변신한 듯했다. 현직 최고의 영상, 음향 감독님들이 재단 유튜브 채널에 실시간 방송 송출도 해줬는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수준. 실제 관객들이 눈으로 목격한 무대보다 몇 배는 더 멋진 공연으로 기록되었다.
지난 6개월간의 기대와 실망, 노력과 아쉬움 등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총 다섯 곡. 20여 분이 쏜살같이 사라진다. 중간중간 실수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시간.
머리 위로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불 꺼진 관객석을 향해 미소를 보내는 것이 좋았다. 그동안 무대에 서면서 무대가 즐겁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늘 잡념이 많았고, 원치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서 하듯이 그렇게 무대에 오르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 안의 나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내 생각보다 더 무대를 좋아하는 듯하다. 완벽하진 않아도 빛나는 내가 무대에 있었다.
드림 스테이지를 경험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공연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마음 한편에 커다란 열정을 숨기고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 시민 대상 무료 프로그램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이기적이지 않으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는 좋은 사람들. 그런 분들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모든 일엔 명암이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 겨우 20분 공연 위해 일반 시민 출연진 가족들은 지난 6개월간 많은 배려와 헌신, 사랑으로 무대를 같이 일구었다. 10대~60대 남녀노소가 가족과 함께 만들었던 드림 스테이지.
조명이 꺼지고 일장춘몽도 끝이 났다.
새벽까지 잠이 들지 못하고 녹화된 영상을 무한히 돌려본다.
손끝으로 찍어서 맛만 본 듯 아쉽고 아쉬운 느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
어리지도 혼자도 아니기에 수천번 수없이 고민하는 자아.
욕심과 꿈 사이 줄다리기.
과연 가능할까? 얼마나? 언제까지?
타고난 재능도, 배움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 전문 공연인이 될 수 있을까?
뮤지컬 맘마미아 '댄싱퀸(Dancing Queen)'
신나게 춤춰봐 인생은 멋진 거야
기억해 넌 정말 최고의 댄싱퀸
주말의 밤이 다가와 갈 곳을 찾아 헤매네
멋있는 음악 찾아 킹카를 찾아 신나게 춤을 추네
어떤 남자도 괜찮아 아름다운 밤 있으니
어떤 음악이라도 나는 괜찮아
언제든 출수 있어 기회만 생기면
넌 멋진 댄싱퀸
어리고 예쁜 열일곱
댄싱퀸 탬버린 소릴 느껴봐 오우예
신나게 춤춰봐 인생은 멋진 거야
기억해 넌 정말 최고의 댄싱퀸
기억해 넌 멋진 최고의 댄싱퀸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성별, 나이, 지역, 가족관계 등 개인정보를 최소한으로 하고 글을 쓰려고 계획했었다.
특출 나지 않은 이들이 자신만의 불씨를 찾아갈 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소망하며 자판을 눌렀지만
자전적인 내용이라 모든 개인정보를 배제할 수는 없으니 누군가가 날 특정하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시작은 있으나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 기획이다.
몇 년이 걸리든 부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결론으로 이 글쓰기가 마무리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