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다.
지난주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02-2656 으로 시작하는 낯익은 번호, 오래 근무했던 직장의 번호였다. 퇴사한 지 한참 지난 나에게 회사에서 전화가 오다니... 어리둥절해하며 전화를 받는데 핸드폰 너머 누군가가 “OOO 사무장님이십니까?” 하며 나를 찾았다. 사소한 용건으로 받은 전화였지만 그 짧은 통화에서 내가 꽂힌 건 바로 'OOO 사무장님'이라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였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내 이름과 직급으로 나를 찾는 전화.
'그래, 맞아! 나도 이렇게 불리던 사람이었어, 나도 내 직업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요즘 나는 경단녀의 고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부쩍 일이 많아진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남편이 바쁘고 일이 잘 돼서 기쁘지만, 집에 있는 내 모습이 바쁜 그의 모습과 겹쳐 보이며 초라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며칠 전 아침, 남편의 출근과 아이의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며 잠에서 잘 깨지 못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아침을 먹이는 중이었다. 유치원 버스를 놓칠까 초조한 마음에 아이의 머리를 묶어주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니, 아이가 “엄마는 우리 가면 집에서 자면 되잖아! 나랑 아빠는 피곤하다구!” 하며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아이의 그 말에 갑자기 속에서 바사삭하며 무언가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어린 딸아이가 한 말이니 웃으며 넘길 수도 있었는데, 난 참지 못하고 “네 눈엔 엄마가 집에서 잠이나 자는 사람처럼 보여?” 하며 정색하고 말았다. 꾹꾹 누르던 뭔가가 터진 느낌이었다.
사실 나도 아침에 눈 뜨면 사과나 깎고 아이 먹일 주먹밥을 싸는 게 아닌 내 일을 위한 출근 준비를 하고 싶었다. 가야 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에게 해야 할 일이 청소, 빨래, 저녁 준비라는 게 한 번씩 힘 빠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주부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다잡았는데, 역시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이 100% 만족스럽진 않았던 모양이다. 오히려 결핍이 있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도 잘 읽지 않는 내가 글을 쓴다니, 놀라운 도전이다. 글쓰기 수업도 듣기 시작하고, 한 달에 한 번 수업이 있는 날엔 남편이 아이 하원을 하기도 한다. 가족에게서 잠시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거 같아서 그럴 땐 조금 행복해진다. 최근엔 브런치 스토리의 작가도 됐다. 오래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해낸,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일이었다. 도전을 해내며 얻는 이 말랑말랑한 긴장감도, 글을 쓰는 동안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이 시간도 다 좋다.
나는 역시 나만의 호칭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호칭은 내가 만들어 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삼십 대는 어느 회사의 OOO 승무원으로 불렸다. 쉽지만은 않았던 그 호칭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항버스에 몸을 싣고 근면성실하게 출근했던 지난날의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브런치 스토리 작가가 되며 나는 잊고 지냈던, 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생겼다. 앞으로의 나는 또 무슨 호칭으로 불릴 수 있을까. 꾸준히 글을 쓰며 진짜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 만으로는 서른일곱, 나는 '미래의 나'를 그리며 오늘도 설레는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