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by 정짜리

지난 주말, 자부의 밤이 열렸다. 1박 2일의 자유부인 타임. 공식적인 연례행사로 일 년에 한 번 친구들과 모여, 먹고 마시고 쇼핑하며 1박 2일의 일정을 소화하는 행사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핫플도 가고 낮술도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다 밤이 되어 숙소에서 또 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어디선가 정체 모를 벌레가 숙소 안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벌레 출현으로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각자 살충제와 전자 파리채, 휴지와 맨손 등을 준비해 함께 벌레를 잡았다. 연차는 다르지만 우린 다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우는 아줌마들이었다. 벌레 정도는 이제 스스로 잡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귀뚜라미와 꼽등이의 중간쯤 되는 이상한 벌레의 출현으로 우리는 각자 벌레와 관련된 무용담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매미를 집에 데려와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울어대는 매미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최근의 일부터 승무원 시절 호텔에서 자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침대 옆에 있던 벌레와 눈 마주친 일, 방콕 야시장에서 신나게 먹고 있는데 누가 자꾸 등을 쳐서 봤더니 손바닥만 한 방콕 바퀴벌레가 등에 붙어 파닥거리고 있던 일화까지, 자부타임이라 그런가 벌레얘기에도 모두들 까르르 웃음이 나왔다.


휴지만 있으면 벌레 잡는건 문제없다, 쥐만 아니면 다 잡는다며 각자의 능력치를 자랑하다가 나도 혼자 벌레 잡은 얘기를 했다.

나는 벌레가 너무너무 싫다. 예전에 홍콩 비행 후 호텔에서 샤워하다가 더듬이를 세운 채 날 향해 돌진하던 벌레를 보고 머리에 거품 그대로 샤워가운만 두른 채 맨발로 호텔 로비로 뛰쳐나간 적도 있고, (그 벌레가 너무 강렬해 그 이후로 홍콩은 여행으로도 가지 않는다) 아이 100일쯤 됐을 땐 환기시킨다고 잠깐 열어둔 창문으로 다리 많고 날개까지 있는 벌레가 집으로 들어와 급하게 아이만 안고 도망쳐 아파트 1층 현관에서 울면서 남편을 기다린 적도 있다. 백일 된 아기를 안고 잠옷 바람에 울고 있던 나를 발견한 아파트 주민분이 무슨 일이 있냐 물어 함께 집에 와 벌레를 잡아주셨다.


하지만 아이와 단둘이 있는데 벌레가 나올 때마다 울며불며 도망갈 수는 없다. 나는 아이를 보호하며 안전하게 키워내야 하는 법적 보호자가 아닌가. 그리고 사실 아이 앞에서 벌레 나왔다고 소리 지르며 울고불고하는 엄마는 너무 모양 빠진다. 그래서 미국이나 호주 슈퍼에 갈 때마다 강력해 보이는 살충제를 사 모으는 등, 나름대로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위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6월의 어느날, 하원한 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와 손 씻으려 화장실 불을 켜는 순간, 하수구를 타고 올라온 건지 이름 모를 벌레가 화장실 바닥을 빠르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맨발인 우리 아이 발에 벌레가 닿을까 두려워 나는 재빨리 아이를 문밖으로 내보내고 미리 준비해 둔 살충제를 화장실 선반에서 꺼내 있는 힘껏 뿌려댔다. (살충제를 방마다 구비해둔 과거의 부지런한 나를 다시 한번 칭찬해주고 싶다) 바닥이 살충제로 흥건해질 때쯤 그 벌레는 배를 뒤집고 빙글빙글 돌아대다가 죽었다. 벌레가 배 까고 빙글빙글 돌 땐 정말이지 나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엄마 이겼냐며 소리 지르는 아이를 위해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되뇌이며 그 순간을 참아냈다. 혹시나 잠깐 기절하고 다시 움직일지도 모른단 두려움에 면장갑, 고무장갑으로 이중 삼중 무장한 채 바들바들 떨며 벌레를 휴지로 집어 변기에 내렸다.

I did it !

결국 내가 해낸 것이다. 누군가에겐 꽁트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상황이, 나에겐 아이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나의 두려움을 극복한 삶의 한 페이지였다.


'자부타임 > 벌레 출현 > 벌레로 고통받은 지난날 회상 > 엄마로서 벌레를 잡아낸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흐름으로 그날의 벌레 이슈도 지나갔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벌레로부터,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지켜가며 이렇게 나도 내 친구들도 엄마가 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 넷.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l'm 정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