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당신
아이폰에서 알림이 떴다. iCloud의 저장 공간이 부족해 백업이 어려우니 매월 결제되는 iCloud 플러스로 전환하라는 친절한 알림이. 200GB의 저장 공간을 쓰며 iCloud에 동기화하는 데는 매월 4,400원의 비용이 들지만, 사실 나에겐 돈도 안 들고 저장 공간의 제약이 없는 평생 쓸 수 있는 공유 공간이 있다.
내 인생의 공유자, 남편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친구들은 남편의 다정한 성격과 그에 걸맞은 운동선수의 다정한 몸(?)때문에 내가 그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더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바로 그의 엄청난 공감능력이었다. 사과를 복숭아라고 우겨도 맞다고 해주고, 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며, 직장 상사의 뒷담화에서 나보다도 더 핏대 올리며 욕해주는 스윗한 그와 내가 결혼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무뚝뚝하고 무심했던 아빠를 보며 '아빠와 정반대의 남자와 결혼해야지' 했던 어린 시절부터 바라온 나의 소망은 마침내 남편을 만나고 이루어졌다.
그와 결혼해서 가장 기쁜 점은 내 핸드폰 속 저장된 그의 이름처럼 진짜 내 편이 생겼다는 것이다. 태생이 본헤이터(Born hater)인 나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세상에 싫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직이라니! 아이러니한 직업 선택으로 인해 예쁜 미소로 사회화된 모습 뒤에 꽁꽁 숨겨진 나의 진짜 모습, 본헤이터(a.k.a. 쌈닭)를 남편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잘 나도 내 자식, 못 나도 내 자식'이란 말처럼 이런 못난 와이프도 내 아내라고 단념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비행이 끝나면 열 올리며 했던 진상 뒷담화, 상사 뒷담화가 이젠 놀이터에서 만난 재수 없는 누구 엄마로 바뀌어도 그는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냈다. “어쩐지, 그 아줌마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더라. 완전 별로던데?! 내가 다음에 한번 째려봐줄게” 하며 그는 언제 어디서나 아내의 편이 돼준다는 우리의 결혼서약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또 남편의 리액션은 늘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부부의 필로우톡 시간. 우리는 자기 전 침대에 누워 각자 재미있는 영상과 짤을 골라 공유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는다. 사람 간의 음식 궁합이 중요한 것처럼 유머 코드가 통하는 유머 궁합도 굉장히 중요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앞에 있는 사람에게 빨리 이걸 먹여서 반응을 기대하는 것처럼 '이렇게 웃긴 걸 나만 볼 수 없지, 너도 보고 빨리 같이 웃어줘, 웃기지 웃기지?' 하는 마음으로 내놓은 나의 유머에 그가 깔깔거리며 함께 박장대소를 해줄 때, 나는 이 정도면 결혼생활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유치원 북페어 행사인 신데렐라 Day를 맞이해, 드레스와 왕관, 진주목걸이와 유리구두로 아이를 정성스럽게 꾸며줬다. 퇴근한 아빠에게 공주님인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아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단단히 반응 준비하라고 연락을 하고 아이와 함께 그를 기다리는데,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들리자 남편은 도어락을 누르며 이미 “우리 딸, 내 사랑, 공주님” 3단 콤보를 외치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 아이를 안고, 빙그레 돌고, 유리구두를 신겼다 벗겼다 호들갑을 떠니 아이는 아빠의 반응에 너무나 흡족해하며 행복해했다. 아이의 밝게 빛나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행복해졌고, 남편에게 고마웠다.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은 최고의 반응이었다.
iCloud 플러스의 유료결제를 신청하고 오랜만에 어릴 적 아이의 영상과 사진을 봤다. 말 못 하고 빤히 보기만 하는 영상에서 울고 떼쓰는 영상까지,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이의 표정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소중한 순간순간이었는지, 그 순간들이 다시 한번 올 수 있다면, 그때의 아이를 한 번만 안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가슴 찡한 상상까지 하게 됐다. 일 하느라 바쁜 남편에게 아이 영상을 계속 보내며 방해해도 남편은 혼자 감성에 젖어있는 나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때가 그리워서 눈물 난다는 말로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아이의 모든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공유하는 사람. 나의 못난 모습도, 잘난 모습도 다 동기화해 주는 사람. 자기 전 함께 깔깔거리는 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언제나 나를 백업해 줄 사람. 그 한 사람이 있어 오늘도 내 삶은 용량 가득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