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의 미학

by 정짜리

지난주 친한 동생이 언니 동네 사는 거 같은데 너무 웃긴다며 혹시 이 사람 아냐고 짧은 영상을 보냈다. “오빠, 건물주가 왜 국산차 타?”라는 영상. 심지어 아는 얼굴이었다. 작년 우리 아파트에 이사 온 사람들로, 당시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 그 집 아이도 다니게 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아이 친구 부모였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디에 건물을 샀네, 사업체를 몇 개를 운영하네' 하는 돈 자랑이 심상치 않더니, 인스타에서 하는 그들의 자랑은 가히 뜨악할 정도였다.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주부의 일상이 무료해지던 때에 보게 된 그들의 자극적인 영상은 어떠한 코미디 쇼보다도 재밌고 흥미로웠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저들은 왜 본인의 결핍을 드러내는 저런 영상을 자랑스럽게 올리는 걸까? 자랑의 심리, 자랑의 이면에 대해 본질적으로 생각해 보게 됐다.


'건물주가 왜 국산차 타?'의 숨겨진 뜻은 이게 아닐까?

1. 건물주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2. 외제차를 타지 않는 현재 상태에 대해 (겁나) 의식하고 있다.

3. '건물주=부자, 외제차=사치'라는 편협한 전제 조건이 깔려 있다.

4. 우린 부자지만 사치는 하지 않는 실속파 부자라며 개념까지 자랑하고 싶다.


건물주가 자전거들 타든 킥보드를 타든, why not? 아무도 신경 안 쓸 텐데 차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그들인 것 같다. 한 번씩 그들을 동네에서 마주칠 때도 로고가 대문짝만 한 명품백을 메고 다니는 모습이었기에, 진짜 부자는 겉치레에 신경을 안 쓴다는 그들의 영상은 나에겐 너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충격이었다. 친한 친구에게도 자랑하려면 밥이라도 사주며 자랑하는 것이 도리인 법인데, 어떻게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을 공개하며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거지? 자랑은 늘 시샘과 질투를 동반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최근에 나도 자랑했다가 아차차 싶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바로 부모라면 참기 힘들다는 '자식 자랑'

글쓰기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데 유치원에서 아이의 영어 발표 영상을 보내줬다. 2주 동안 나와 열심히 준비한 발표여서, 나도 아이도 엄청 기대하고 걱정했던 발표였다. 영상 속 아이가 너무도 완벽하게 발표를 끝내고 친구들과 선생님의 환호에 수줍게 씨익 웃는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들뜨고 말았다. 친한 엄마 두 명과 하는 카톡방에 무심코 아이가 영어 발표를 너무 잘했다며 자랑을 해버린 것이다. 영상을 보여달라는 엄마들의 말에 신나게 영상을 보내고, 다들 너무 잘한다고 뿌듯하겠다며 하트와 이모티콘은 눌러 축하해 줬지만, 얼마나 준비한 거냐, 엄마랑만 준비한 거냐는 몇 가지 질문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친한 엄마끼리 하는 카톡방이라 아침부터 잘 때까지 소소한 말들이 계속 오가는 곳이었는데, 그날은 이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의 반응에 나는 섣불리 자식 자랑한 것이 후회됐다. 친하다고 너무 편하게 생각했다. 모두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보니 다른 아이가 잘하는 모습이 무작정 축하해 줄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며칠 전 카톡방의 한 엄마는, 영상 속 우리 아이가 너무 잘해 위기감을 느껴 아이를 더 공부시키고 있다며 웃으며 뼈 때리는 말도 했다. 아무리 친해도 자랑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 거 같다. 자랑할 만한 좋은 일은 가족에게 말하고, 약점이 될만한 안 좋은 일은 더더욱 남에게 말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은 역시 내 인생에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말 안 하고 가만있음 중간이라도 가지만, 한 번씩 참기 어려울 정도로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땐 자랑하는 사람의 애티튜드가 중요할 것이다. 자랑은 하지만 표정이나 태도가 너무 밉상처럼 보이지 않아야 하며, 듣는 사람 입에 뭐라도 먹이거나 손에 뭐라도 쥐여주며 자랑하고, 자랑은 하되 선은 넘지 않아야 하며, 겸손을 바탕으로 한 자랑을 하고....

자랑,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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