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동네 수영장에 갔을 뿐이다.

(feat. Lucky Vicky)

by 정짜리

지난달 허리를 다쳐 한참 골골대니, 평소 수영을 즐겨하던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얼떨결에 동네 수영장에 등록하게 됐다. 친구가 알려준 브랜드의 수영복을 사고, 친구의 조언대로 수영 전 간단한 요기도 하고, 친구가 신신당부한 수영장의 실세(?)인 할머니들 눈 밖에 나지 않는 행동 리스트까지 숙지한 채 산뜻하게 오전 수영 초급반에 들어갔다. 나름 준비를 철저히 해서인지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즐기며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수영 강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항공사 승무원은 입사 전 체력 테스트를 보는데 그중 하나가 생존수영이다. 몇 미터의 거리를 시간 내에 들어와야 합격인데 최종 합격 전 수영 테스트를 위해 바짝 한 달 수영을 배우고는 거의 15년 만에 수영을 배우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기도 하고, 새롭기도 해서 처음 한 달은 신이 난 채 수영을 배웠다. 아예 수영을 못하던 것도 아니어서 나는 한 달 만에 자유형, 배영, 평영까지 진도도 쭉쭉 나갔다. 그렇게 활기찬 한 달이 지나고 10월, 길고 긴 추석 연휴를 겪으며 찬 바람이 불어오자 거짓말처럼 수영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렇게 긴 추석연휴라니... 심지어 아이의 유치원은 연휴 앞뒤로 No school day를 붙여 엄청나게 길게 쉬었다.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이 연휴 동안 내게 어떤 열정이 남아있겠나, 나는 소진돼 버렸다.


연휴가 끝나고 며칠 연속 계속 수영을 빠지다, 오늘도 안 갈 거냐는 남편의 한마디에 어쩔 수 없이 수영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차가운 수영장 물을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 그냥 차 돌릴까 하는 고민을 열 번째 할 때쯤, 결국 수영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체념하며 차를 대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저씨가 튀어나와 버럭 화를 냈다.

“에이씌, 작업 중인 거 안 보여요?!!”


안보였다. 진짜 안보였다. 옆 차들에 가려져서 아예 안 보였는데... 고함을 지르는 아저씨에게 살짝 당황했지만, 나는야 전 세계의 화내는 아저씨들 쯤 수도 없이 겪어본 경력직이라구.

“어머, 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더 나긋나긋 얘기하고 잽싸게 그 자리를 피했다.


나는 기분이 망칠 것 같은 순간을 그냥 두지 않는다. 빨리 피한다.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9시 30분이 아닌가, 버럭쟁이 아저씨 때문에 내 하루가 꿀꿀해질 수는 없다. 내 소중한 오늘을 지켜야 한다. '오기 싫었는데 괜히 왔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일부러 집에 가는 길에 로또나 사 갈까, 스벅 신메뉴는 맛있을까 하는 딴생각을 하며 서둘러 수영장에 들어갔다.


그런 게 이게 웬일인가. 수영장에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오늘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자유수영 데이였다. 한가한 수영장에서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레인에서 걷는다고 뭐라 하는 강사님 눈치 안 보고 유유자적 하고 싶은 수영 하면 되는 날이었다. 해달처럼 물에 둥둥 떠서 놀기도 하고, 잘 안 되는 평영 발차기 연습도 실컷 하고 있는데 같은 반 아주머니가 수경 고리가 빠졌는지 찾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혼자 애쓰시는 것 같아서 '한 살이라도 젊은 내가 도와드려야지' 하는 장유유서 spirit으로 수영장 바닥에서 고리도 같이 찾고, 너무 촘촘해 끼우기도 어려워 보이는 수경 고리도 낑낑거리며 끼워드렸다. 늘 새초롬하게 말 한마디 안 하던 내가 먼저 나서서 도와드리니 물안경 주인인 아주머니 포함 주변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씬 줄 알았는데 애기엄마여서 이렇게 싹싹하냐는 둥, 아기 낳았는데도 어쩜 이렇게 날씬하냐는 둥, 나는 급 예쁨과 관심을 받게 됐다. 그리곤 내가 수영할 때마다 아주머니들은 디테일한 코칭을 해주셨다. 수영장을 오래 다녀서 그런지 아주머니들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알려준 대로 하니 제자리에 머물던 나의 평영 발차기도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한 번의 선행으로 이런 예쁨을 받다니,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화기애애하게 한 시간의 자유 수영을 마치고 인사를 하며 나오는데, 뒷타임 아쿠아로빅 수업을 위해 손뼉 치며 수영장을 뱅글뱅글 도는 워밍업 운동을 하시던 할머님 한 분이 날 붙잡으셨다. “수영하는 폼이 너무 멋져요. 인어인 줄 알았어!” 하며 따봉을 날려주는 것 아닌가.


OMG, 오늘은 완전 럭키비키잖아!


남편의 잔소리에 수영가방을 들고 나서지 않았다면, 중간에 차 돌려 집에 갔더라면, 주차장 버럭쟁이 아저씨 때문에 맘 상했더라면, 하마터면 소소한 행운으로 가득 찬 오늘을 놓칠 뻔했다. 잔잔한 호의와 무심코 건넨 친절과 인어 같다는 생전 처음 드는 황홀한 칭찬까지 더해진 오늘. 정말 럭키비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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