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 전쟁을 마치고 한숨 돌리며 막 소파에 앉았을 때였다. 아파트 인터폰이 울렸다. 지난주에 창고 정리 후 남편이 버린 캐리어의 폐기물 신고 비용을 청구하는 경비아저씨의 전화였다.
“남편이 만 이천 원 나왔다고 신고했다고 했는데, 아닌가요?”
“어이쿠, 서로 이러시네. 바깥양반은 집사람이 낼 거라고 하던데요? 어쨌든 빨리 갖다 줘요.”
부글거리며 돈을 챙겨 경비실로 갔다. 늦게 드려 죄송하다고 요구르트와 돈을 경비아저씨께 건네고 남편에게 전화를 거니, 세상 좋은 목소리로 “아, 내가 드리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안 계셔서 못 드렸어” 하는 것이다.
새파란 거짓말이다.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된 일이다. 작년에 아이의 커다란 곰 인형을 버릴 때도, 올여름 식탁 의자를 버릴 때도, 그리고 지난주의 캐리어까지. 그는 매번 폐기물 비용을 내지 않고 그냥 와, 몇 번이나 경비아저씨의 빚 독촉 인터폰을 받게 했다. 처음엔 순순히 남편의 말을 믿고 깜빡했나 보다 했지만, 이제는 그의 시커먼 속내를 안다. 삼성페이며 서울페이며 신용카드와 페이결제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내 지갑의 현금 보유는 귀찮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더욱 귀해진 현금의 가치로, 그는 자기 지갑 속 현금을 지키기 위해 교묘히 내 현금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현금을 얻기 위해서는 ATM까지 가서 손수 돈을 뽑는 귀찮음을 이겨내야만 하는데, 어떻게 남편이란 작자가 매번 아내의 현금을 노린단 말인가. 한동안 잠잠했던 울화가 다시 치밀기 시작했다.
비단 폐기물 신고 비용뿐만 아니다. 발렛비나 주차비도 마찬가지다. 현금을 낼 타이밍이 오면 남편은 미적거리며 시간을 끈다. 성격 급한 내가 후다닥 돈을 먼저 꺼낼 것을 잘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파악한 내가 이제는 꿈쩍 않고 발렛비를 내지 않자, 그는 조금 더 과감한 시도까지 하기 시작했다.
“여보야 잔돈 없어? ^^ 난 오만 원짜리밖에 없네.”
“응, 발렛 아저씨가 잔돈 있대. 오만 원 내도 돼 자기야 ^^”
발렛 부스 앞에서 우리는 칼과 방패의 싸움을 한다. 물론 매우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말이다.
청담동의 레스토랑에서 그를 처음 만나던 날, 한창 시즌 중이던 그를 배려해 내가 마실 화이트 와인을 한 잔만 주문하자 그는 통 크게 와인 한 병을 시켰다. 남겨도 되니 편하게 마시라던 멋진 멘트까지 덧붙이며. 그때의 그는 쩨쩨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이제는 각자의 현금을 지키기 위해 눈치게임을 하고 있다니, 결혼 생활이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외동아들로 자라며 받는 게 익숙한 남편은 원래 좀 얄미운 편이다. 신혼 때 퇴근하고 시댁에 가서 밥을 먹을 때였다. 퇴근이 늦었던 우릴 기다리시던 어머님이 자긴 먼저 먹었다며, 편하게 먹으라고 소고기를 옆에서 구워 오마카세처럼 한 점씩 주고 계셨다. 나는 그 상황이 불편하고 죄송스러웠는데, 남편은 차돌이 양이 적네, 오늘 파절이는 별로네 하며 계속 한 마디씩 거드는 게 아닌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구워주시던 어머님이 '하.. 얄밉다' 나지막이 혼잣말하는 걸 나는 듣고 말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에게도 어머님의 그 음성이 오버랩되고 있다.
식사가 끝나면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식탁 치우는 것도 거들지 않고 소파로 가서 앉는 남편, 목이 말라 물 마시려 컵에 따르면 어디선가 나타나 얌체처럼 쏙 마시는 남편, 새로 뜯은 양말 포장지를 쓰레기통 바로 옆 테이블에 떡하니 놓고 가는 남편, 아이와 씨름하며 숙제 봐주고 있는데 야구 중계 보며 환호하는 남편.
그러다 마침내 쌓여만 가던 나의 울화 게이지에 마침표를 찍게 한 일이 생겼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육퇴 후 침대에 누워 쇼츠 보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아이 얼굴이 모기에 물려 울긋불긋해진 터라 모기에 초예민했던 나는 바로 안방 문을 닫고 불을 껐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 모기를 찾아 나서는데 웬일인지 이놈의 모기는 나오지도 않고 얄미운 남편은 이 날씨에 무슨 모기냐며 잘못 들은 거야 말만 나불거리고 있었다. 에잇 하며 남편을 째리는데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남편의 귀에 앉아있는 시커먼 모기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새처럼 날아 벌처럼 쐈다. 손바닥엔 모기가 빨간 피를 내뿜으며 죽어있었고 동시에 남편의 뺨도 빨개져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남편의 첫 귀싸대기(?)를 때렸고, 남편은 모기한테 물리고 아내에게 귀싸대기도 맞는 일타이피의 경험을 하게 됐다. 너무 놀라고 아파서 눈물이 맺힌 남편을 보자 조금 미안해졌지만, 손을 씻으러 욕실에 가서는 끅끅거리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모기, 니가 날 도와주다니!
얄미움이 모기와 함께 씻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