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밸런스 게임

by 정짜리

아이 과학 수업을 마치고 금요일 저녁의 퇴근길을 뚫고 집에 가는 중이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맥 빠진 목소리로 '사는 게 너무 허무하다...' 하길래 순간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통화를 이어가며 얘기를 해보니, 사실은 남편이 잘 나가는 전문직 친구와 통화 후 현타가 와서 그런 것이었다. 에잇 진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을 꾹꾹 누르며 공감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남편의 푸념을 들어줬다. 남편은 전문직 부부인 친구 부부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8억을 모았다는 얘기를 하며, 돈도 잘 버는 그들은 한 달 내내 외식도, 배달도 하지 않고 안 먹고 안 쓰며 돈을 악착같이 모으고 있다고 했다. 또 모은 돈으로 주식까지 잘해서 추가로 2억을 더 벌어 10억을 채웠다며 남편의 마지막 남은 멘탈도 흔들어 놓았다. 얘기를 듣다 보니 갑자기 나도 속이 쓰리고 위가 콕콕 쑤시는 게, 요즘 잠잠했던 위염이 도질 것 같았다. 사람이라면 역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게 정상이 아닌가. 나는 정상인이다. 그러나 이성을 탑재한 정상인이지.


“그래서 뭐, 그 오빠가 10억을 모았는데 뭐! 배달도 안 시켜 먹고 맨날 집에서 쌀 씻어 갓 지은 밥에 김치 올려 먹자구? 난 그렇게는 못 살아. 그냥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입고 싶은 거 입으면서 10억 안 모을란다. 어쩔티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나의 능력치와 나의 한계치를 파악하며 사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나라는 사람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고비를 넘길 나만의 방법도, 전략도 빨리 찾을 수 있다.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으며(사실 지겨워함) 주 3-4회 밥 하는 것이 최선인 전업주부다.
나는 먹고 쓰는 것에서 얻는 즐거움이 매우 크다.
돈을 모으기 위해 이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산다면 내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결론은 너무나 명확하다. 잘 나가는 전문직 부부와 나의 현재를 비교해서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은 돈을 모으는 것에서 얻는 행복이 크고, 나는 먹고 쓰면서 얻는 즐거움이 더 큰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남편은 나보다 더 쇼핑과 외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 부부도 이렇게 먹고 쓰고 남은 돈으로 알뜰살뜰 저축도 하지 않나, 꼭 10억을 모아야만 돈을 모으는 것은 아니니까. 각자의 예산 안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대로 합리적으로 살면 되지 뭐.


이런 성향으로 나는 sns도 하지 않는다. 겉보기와 달리 누구보다 유리멘탈인 나를 내가 잘 알기에, 남들은 다 인스타를 해도 나는 꿋꿋이 하지 않는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다. sns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기웃대며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아예 차단해서 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나에게도 관종력은 있다. 국제선 승무원을 오래 하며 세계 곳곳을 누비던 내가 아닌가. 하와이에서 요트를 타고 선상 파티를 즐길 때나, 로마 뒷골목의 어느 작은 바에서 맛있는 와인을 마실 때, 발리의 노을 지는 해변에서 서핑하는 나의 모습에 스스로 취해있을 때, 나도 sns에 올리며 마음껏 관종미를 뽐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의 관종력을 포기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택했다.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은 좀 아쉽지만 마음의 평화는 지켰으니, 나의 밸런스 게임은 성공한 편이다.


어쨌든 산다는 건 계속 밸런스 게임을 하는 것이다.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아직 10억은 모으지 못한 우리 부부를 위로하는 기념으로 나는 오늘도 야식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고 남편은 진로 두 병을 품에 안고 편의점에서 뛰어오고 있다. sns에 올릴 정도로 근사하진 않더라도 부부만의 오붓한 술자리를 갖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가 오늘도 내 삶의 밸런스를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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