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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 세계 Nov 03. 2022

흥국사에서 양궁을 쏘다

89년 10월 29일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법이니..

                     삶 / 푸쉬킨

JJ 넌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좋으니

난 말이야. 하늘에 언제나 떠 있는 

구름이 좋단다.

왜냐구?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높고 너무나도 푸르거든 

자기 마음대로 모양도 바꾸고 친구인 바람과 항상 같이 다니거든

가끔가다 심술궂은 장난도 치지만 말이야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그늘도 주고

또 우리가 먹는 물도 주고...

난 구름이 좋아...


<흥국사 양궁을 쏘다>

여수 시내에서 가까운 흥국사라는 절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누나들 그리고 형과 함께 간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서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맛있는 걸 사주시겠다며 가끔 데려갔던 곳이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삼계탕집이다. 그때 가스버너 위에서 뜨겁게 보글보글 끊던 노란 삼계탕 국물과 찹쌀 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느 날은 JJ와 흥국사를 찾았다. 

절까지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같이 걸었고 옆으로 흐르는 작은 계곡들의 물 흐르는 소리가 기억난다. 

차가운 계곡물에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고 물장구를 치던 일 그리고 내 어깨를 툭 치며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해맑게 웃던 JJ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그때당시 JJ는 말 끝마디를 ‘~ 하니’, ‘왜~ 그러니’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여수 아이들은 이런 말투를 잘 사용하지 않는데 JJ는 자주 사용하곤 했다. 

흥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양궁을 같이 쐈던 일이다. 

흥국사 같은 작은 관광지에는 길가에 활을 쏠 수 있는 놀이시설이 있었다. 

가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열 발에 이천 원 정도 했던 것 같다. 

둘이 다섯 발씩 나눠서 활을 쏘았는데 난 처음 쏴본 실력치고는 그런 대로 잘 맞추었다.

그런데 JJ가 문제였다. 

과녁이 세 개가 있었는데 우리가 쏘기로 정한 가운데 과녁은 한 발도 맞지 않은 것이다. 

JJ가 쏜 다섯 발 가운데 네 반은 땅에 떨어지거나 옆으로 비켜나갔고 나머지 한 발이 어처구니없게도 왼쪽 과녁에 맞은 것이다. 

그것도 정 중앙에 말이다. 

난 이날의 일을 JJ와 내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 번째 암시라고 늘 생각했다. 

원래 목표였던 중앙의 과녁을 벗어나 옆 과녁에 맞은 화살을 보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첫사랑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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