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귤껍질과 어머니
과거의 세세한 스토리보다는 어떤 순간을 스냅사진처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지난주 덕분에 제 기억의 꼬리를 잡아끌어 젊은 시절의 어머니 모습을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께서 그러하듯이 나이는 드셨어도 여전히 우리 가족의 따뜻한 울타리로 계십니다.
글의 소재로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에 당신에 대한 조각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그날의 기억사진은 내가 마루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놀다가 인기척과 더불어 남겨진 엄마 얼굴입니다.
겨울이었습니다.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가서 몇 년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비슷하게 생긴 가정집이 쭉 있습니다. 골목은 늘 아이들로 시끄러웠고 저를 포함하여 3남매가 들락거리기 편하라고 우리 집 대문은 늘 조금 열려 있습니다. 집안에서 대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푸세식(?) 화장실과 그 옆 평평한 계단에는 다양한 크기의 장독대가 놓여 있습니다. 덩치 가장 큰 장독대 위 플라스틱 채반에는 노란빛이 바래진 껍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모두가 아껴야 하는 시절이니 귤껍질도 차로 드시려고, 햇볕에 말리던 것들인 모양입니다. 그날은 겨울 햇살도 부드럽습니다.
그때입니다. 대문이 살짝 열리나 싶더니, 낡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우리 집 마당에 불쑥 들어와 귤껍질을 주워 입에 넣었습니다. 그는 허름한 외투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까치집처럼 산발을 하고 얼굴은 거칠었던 것 같습니다.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부엌에 있던 엄마에게 “엄마! 거지가 우리 귤껍질을 먹고 있어!” 나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 사람도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느닷없는 내 소리에 놀라셨지만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셨습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왜 쫓아내지 않는 걸까? 그때 엄마는 조용히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그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선에는 연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속에 엄마의 또 하나의 얼굴 모습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걸인들이 꽤나 있었던 시절입니다.
요즘은 물질이 넘치고 소비가 미덕인 세상이 되었습니다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여전히 삶의 무게에 지쳐 노숙생활을 하거나 하루도 쉼 없이 작은 돈이라도 손에 쥘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조금 더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