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가을 함성과 최루탄
어느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그것을 즐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가을 이만 때면 잠실 운동장과 안암골, 그리고 신촌거리 모두는 우리 젊음의 함성과 낭만으로 가득 찼었다. 사학명문 두 대학이 서로의 자존심을 걸고 맞붙는 정기전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일종의 청춘 축제이자,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집단적 외침이었다.
잠실운동장은 붉은 크림슨 물결과 푸른 물결이 넘쳐나고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절대 함성의 기세로는 질 수 없다는 듯 목이 쉬어라 내질렀고, 우리는 하나이고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인 것처럼 그렇게 즐겼고 또한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무거운 짐도, 앞날의 불확실함도 잊을 수 있었던 듯싶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또 다른 함성으로 우리는 하나로 뭉쳤었다.
우리는 잠실운동장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응원 구호와 함께 학생들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구호는 달라졌다. 운동장의 열기가 “민주 쟁취”의 함성으로 바뀌었다. 깃발과 현수막이 앞에 서고, 학생들의 긴 행렬은 스크럼을 짜며 도로를 메웠다.
그 기억조각은 지금 생각해도 선명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청명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있었고, 그리고 경찰들이 저 멀리 언덕 도로를 위협적으로 막아섰었다. 방패를 들고 헬멧을 쓴 전경들과 잠시의 대치와 정적이 흐른 뒤, 경찰은 곤봉을 들며 앞으로 밀고 들어왔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눈과 목을 자극하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학생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나에게는 그 당시 내 머리 위에서 터지는 최루탄의 연기와 폭음은 두려웠지만 친구들과 선후배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눈물이 쏟아지고 숨이 막히고, 연기로 앞도 잘 구분도 안 되는 곳을 이리 뛰고 저리로 넘어 그다음 약속장소로 삼삼오오 모여 우리 세상을 즐겼고 그렇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외침도 함께였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때의 열정을 몸으로 다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을이 찾아오면, 여전히 귀에 맴돈다. 잠실의 관중석을 가르던 함성, 그리고 도로 위에서 터져 나오던 구호.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낸 그 소중한 무엇에 대한 추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