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속삭임

by 여행자 제오키

A.T. 641년 오디세우스호 지구로부터의 거리 약 6.19광년

20년이라는 시간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빚어내기에 충분했다. 한 세대가 태어나고, 잊음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낡아갔고, 더 이상 하나의 방주가 아니었다. 과거의 비극이 남긴 보이지 않는 상흔은 명백한 국경이 되었고, 서로 다른 언어와 시간을 살아가는 두 개의 행성이 되어 서로를 멀리서 공전하고 있었다. 인류는 두 개의 다른 종(種)으로 진화 중이었다.


더 코어

회색과 은색, 그리고 데이터가 흐르는 회로의 차가운 푸른빛으로 직조된 침묵의 왕국. 모든 것은 기능성을 위해 존재했다. 이곳의 공기는 언제나 서늘하고 건조했으며, 이온 필터를 통과하며 미세한 오존 향을 풍겼다.

복도는 계산에 의한 가장 효율적인 직선이었고, 벽은 무미건조한 무채색의 패널로 마감되었다. 조명은 생체 리듬에 맞춰서 찰나의 오차조차 허용 치 않는 듯 밝기를 조절했다. 개인적인 장식물은 비효율적인 공간 낭비로 간주되어 제거되었다. 벽을 따라 흐르는 데이터의 푸른 빛만이 유일한 장식이었다.

대화는 정보 교환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위해서만 허용 되었으며, 웃음소리는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 부하를 유발하는 노이즈이며, 눈물은 교정되어야 할 화학적 불균형이었다. 아이들은 놀이 대신, 시뮬레이션 속에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배웠다.


이곳은 함선의 두뇌였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통제되며, 최적화되는 완벽한 시스템. 제시안 아르코스의 세계였다.


더 가든

살균된 공기가 멎는 경계를 넘는 순간, 세계는 혼돈과 생명력으로 폭발했다. 이곳의 공기는 언제나 따뜻하고 습했으며, 흙냄새와 이름 모를 꽃향기와 식당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연기를 머금고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고장 난 기계 부품으로 만든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비좁고 구불구불하며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도가 뻗어 나갔다. 복도의 벽은 제멋대로 자란 식물들의 푸른 잎들과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시 구절이 어지럽게 덮혀 있었다. 조명은 제각각의 밝기로 깜빡였고, 공간은 언제나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다툼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함선의 자궁이자 영혼이었다.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이며, 살아있는 유기체. 아일리아 시데리스의 세계였다.


균열은 언제나 가장 약한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더 가든 C-7 구역

이 구역의 공기는 미세하게 탁했다. 눈에 보이지도, 냄새로 맡을 수 없는 변화였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피부로 알았다. 공기 속의 습기는 예전보다 무거워졌고 숨을 쉴 때마다 폐 속 깊숙이 아주 작은 모래알이 남는 듯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열다섯 살의 라이샌더 시데리스는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는 엘라라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엘라라는 함선에서 태어난 아이답지 않게 만성적인 천식을 앓고 있었고, 지난 일주일 사이 악화된 공기는 소녀의 작은 폐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쌕쌕거리는 엘라라의 숨소리는 라이샌더의 심장을 파고드는 유리 조각 같았다. 어머니는 늘 대화와 이해를 말씀하셨지만, 저 차가운 금속 벽 너머의 인간들이 대화의 대상인가? 아니, 그들은 자신들의 데이터 속에 엘라라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괴물들일 뿐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려 하는가? 라이샌더 시데리스는 피가 끓는 듯한 무력감과 분노를 느꼈다.


“조금만 더 참아, 엘라라. 곧 괜찮아질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위로보다 무력한 분노가 맺혀 있었다.


어른들은 산소 농도 조절기가 만성적인 효율 저하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함선 전체를 위협하는 재난은 아니었다. 그저 이곳 사람들, 가장 약한 아이들부터 서서히 병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암세포 같은 것이었다. 라이샌더는 알고 있었다. 조절기의 핵심 부품은 '더 코어'의 중앙 창고에 있었다.


아일리아 시데리스는 공동체의 구심점인 기억의 나무 조형물 아래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급히 찾아간 어머니 앞에서, 라이샌더의 목소리는 무력감과 분노로 더욱 처절하고 절박했다.


“어머니! 저들은 엘라라의 고통을 데이터로만 보고 있어요! 왜 저들과 맞서 싸우지 않으시는 거예요? 어머니의 대화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어요!”


그의 항의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상주의적인 방식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무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아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슬펐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은 가장 마지막 선택지란다, 아들아.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야.”


그녀의 대답은 아들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 오히려 이해받지 못했다는 더 깊은 무력감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브릿지

홀로그램 스크린 너머로 마주한 아일리아 시데리스와 제시안 아르코스는 서로의 눈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각자의 데이터 패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더 가든 C-7 구역의 생명유지 시스템에 대한 긴급 수리 지원 및 부품 교체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아일리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당신들의 통제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병들고 있다’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헥사는 즉각 분석 데이터를 띄웠고 잠시 침묵하던 제시안이 입을 열었다.


“해당 부품의 마모율은 정상 범위를 초과했소. 원인은 귀측의 비효율적인 유지보수 프로토콜로 인한 과부하가 명백하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아일리아는 생명을 방패로 압박했고, 제시안은 시데리스의 비효율이 초래한 결과라며 맞받았다. 그들은 여전히 각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었지만, 그들의 신념이 다음 세대의 마음에 어떤 치명적인 증오를 물려주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두 지도자의 차가운 전쟁은 변함이 없었다.


잠시 후, 숨 막히는 정적을 가른 것은 제시안이었다.


“부품을 제공하지. 단, 우리 진단팀이 직접 해당 구역에 들어가 시스템 전체의 비효율을 진단하고 최적화하는 조건으로.”


그것은 지원을 빙자한 내정간섭이자, 더 가든의 데이터를 수집하려는 명백한 의도였다. 아일리아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진단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와 그로 인한 우리 사람들의 피해는 전적으로 당신과 당신의 팀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더 가든 C-7 구역

진단팀은 세 시간 뒤 더 가든에 도착했다. 카이렌이 팀을 이끌었고, 그들 모두는 외부 오염을 차단한다는 명목 아래 하얀 방호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구호팀이라기보다는 역병 지대에 들어선 점령군에 가까웠다.


생명유지 시스템을 점검하던 카이렌의 눈에, 시스템 로그에서 0.01초간 나타났다 사라진 비정상적인 데이터 패킷의 흔적이 스쳤다. 단순한 노이즈로 치부하기엔 그 패턴이 기이할 정도로 정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파고들 시간이 없었다.


대열의 가장 뒤에는 열세 살의 소녀가 있었다. 제시안의 딸, 레아 아르코스였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직접 파견을 요청했다. 데이터로만 보던 비효율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샌더는 그들을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이상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불쌍한 엘라라가 저 차가운 기계들에게 짓밟히는 것 같았다.


충돌은 고장 난 산소 농도 조절기 앞에서 일어났다. 카이렌과 팀원들이 복잡한 패널을 살피는 동안, 레아는 자신의 데이터 패드를 들여다보며 경멸적인 어조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렇게 자원을 낭비하는 건... 비논리적인 걸 넘어, 공동체 전체에 대한 일종의 범죄예요.”


그것은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었지만, 시데리스의 방식을 단순한 비효율이 아닌 도덕적 해이로 규정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보다 더 극단적인 사고가 담긴 독설이었다.


그 말은 헐떡이는 엘라라의 모습과 교차되며 라이샌더의 마지막 이성을 끊었다.


“네 데이터에 저 아이의 고통이 측정되기는 해? 저 아이가 숨 쉴 때마다 느끼는 공포가 계산되냐고! 이건 그냥 기계가 아니야. 우리 삶의 방식이라고! 너희 같은 기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져 있었다.


레아는 헬멧 속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라이샌더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버그를 분석하는 것 같았다. 차가운 유리가 두 아이의 시선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헬멧의 강화유리가 아니었다. 20년의 시간이 두 개의 다른 현실을 빚어내 만들어낸, 결코 녹일 수 없는 불신의 빙벽이었다.


진단은 부품 교체라는 임시적인 해결책으로 마무리되었다. C-7 구역의 공기는 다시 안정을 찾았고 더 코어의 팀은 철수했지만 더 가든의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브릿지

카이렌은 제시안에게 생명유지 시스템에서 발견한 사실을 비밀리에 보고했다.


"사령관님, 단순한 노후화가 아닙니다. 시스템 로그 가장 깊은 곳에서… 외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지극히 미약하지만 인공적인 신호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주기나 패턴이 함선 내 그 어떤 시스템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치... 지능을 가진 것처럼 기존의 오류를 흉내 내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바이러스 같습니다."


제시안은 홀로 브릿지에 남아 칠흑 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이 유령 신호의 정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아일리아에 대한 경멸이 아닌, 미지의 존재에 대한 차가운 경계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함선 안에 그의 통제 밖의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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