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의 시작

by 여행자 제오키

A.T. 621년, 오디세우스 호(號) 브릿지 지구로부터의 거리: 약 53AU

"아광속 드라이브 카운트다운 59분57초. 태양으로부터의 모든 직접 신호는 점진적으로 소실됩니다."


브릿지에 울려 퍼진 헥사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돌이킬 수 없는 선고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메인 스크린의 중앙에서 태양은 이제 막 마지막 빛을 발하는 하나의 작은 별에 불과했다. 저 빛이 사라지면 그들은 완벽한 이방인이 된다. 고향을 잃은 자들에서 고향이라는 개념조차 잃어버린 자들로. 함선 전체에 마지막 고향의 빛이 사라진다는 불안과 숙연함이 감돌았다. 헥사는 이를 인간의 집단적 상실 반응으로 분류하며 조용히 기록하였다.


제시안 아르코스는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그는 브릿지에 선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별을 향한 그들의 시선. 숙연함. 비효율적인 감상. 그는 이 상징적인 순간을 애도가 아닌 새로운 질서를 각인시킬 기회로 보았다. 마지막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과거의 모든 규칙은 무효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세우는 자가 이 방주의 주인이 된다.


그는 헥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카이브 현황은?"


"시데리스 대표를 포함한 다수가 집결 중입니다. 내부 통신에서는 해당 구역을 성소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심리적 적응 메커니즘으로 보입니다. 상실에 대한 의식화된 공간 창출. 추가 분석이 필요하십니까?"


성소.

제시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의 완벽한 시스템 안에 생긴 용납할 수 없는 오염이었다. 그는 헥사에게 물었다.

"저 성소가 함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산해."


[긍정적 요인: 시데리스 진영의 단기적 사기 진작]

[부정적 요인: 아르코스-시데리스 간의 적대감 심화]

[장기적 분열 가능성 91%로 상승]


데이터는 명확했다. 저 감정의 응어리는 언젠가 터질 종양이었다. 그는 카이렌의 통신 채널을 열었다.

"카이렌, 아카이브의 상황 확인이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확인의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산 확보를 염두에 두신 것입니까?"

카이렌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저 성소가 함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산했다. 장기적 분열 가능성 91%. 방치할 수 없는 종양이다."

제시안은 짧게 설명했다.


"사령관님, 제 소견으로는… 그들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에즈라의 죽음 이후 저 월석은 그들의 유일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것을 강제로 제거하려 한다면, 예측 불가능한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물리적 충돌은 피하는 것이..."


"알겠다."

제시안은 잠시 카이렌의 우려와 헥사의 데이터를 종합하여 분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카이렌. 지금부터 아카이브의 자산 확보 작전을 개시한다. 저항이 있을 것이다. 너의 임무는 월석 확보가 아니다. 그들의 저항 방식, 강도, 그리고 그들의 논리 구조를 파악해 보고하라. 데이터 수집이 최우선이다."


그는 이 오염의 강도를 직접 측정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목소리는 브릿지의 무거운 침묵을 칼날처럼 갈랐다.


아카이브

카이렌과 보안팀이 아카이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저항이 아닌 고요한 긴장이었다. 아카이브는 수십 개의 램프 불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그 중심에 홀로그램 받침대 위에서 월석이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아일리아와 수십 명의 시데리스 추종자들이 조용히 명상하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기운이 공간을 채웠다.


카이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멈췄다. 오르사. 그녀는 무릎에 어린아이를 앉힌 채 카이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탐색하는 듯했다. 카이렌은 보안팀을 입구에 세운 채 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최대한 중립적인 톤으로 입을 열었다.


"오르사. 이곳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군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함선 전체의 안정을 위해 알아야 할 부분입니다."


오르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미소는 미묘했다. 환영도 적대도 아닌 상대를 가늠하는 듯한.


"카이렌. 당신이 여기 온 이유를 먼저 말해 주시겠어요? 단순한 점검인가요? 아니면 더 구체적인 무언가? 이곳은 지금... 평화로운 모임일 뿐이에요. 월석이 우리에게 주는 빛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카이렌은 그녀의 말에서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월석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그 자연스러운 현상이 꽤 조직적으로 보이는군요. 그건 그렇고, 이 월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악한 것이 있습니까?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적인 측면이라던가…"


오르사의 눈빛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직접 답하지 않고, 카이렌의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이라... 흥미롭네요. 당신들 사령관은 항상 그런 실용적 관점으로 보시죠? 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월석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것은 우리에게 연결을 상기시켜 주죠. 당신이 그걸 제거하려 한다면, 그게 정말 함선 전체의 안정을 위한 선택일까요? 오히려 사람들의 불안을 키우는 건 아닐까요?"


카이렌은 그녀의 유도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불안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모임이 확대되면 자원 분배나 시스템 부하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구체적인 계획을 공유해 주시면 제가 중재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오르사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 속에 카이렌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듯한 냉기가 스며들었다.


"중재라... 좋은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구체적 정보는 여기서 나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곳은 성소가 되었으니까. 아일리아가 우리에게 준 건 당신들 사령관의 명령 뒤에 숨은 공허를 채워주는 거예요.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안정을 원한다면 이 모임을 인정하는 게 첫걸음일 텐데요. 아니면... 당신의 진짜 목적이 다른 건가요?"


카이렌은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오르사는 그의 질문을 피하면서도 날카롭게 제시안의 약점을 찔렀다. 그는 더 이상 깊이 파고들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지요. 추가 논의가 필요할 수도 있겠군요."


그는 제시안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아카이브 내 추종자 규모는 50명 이상으로 추정. 월석은 상징적 역할을 넘어 심리적 안정제로 기능 중. 오르사는 정보 공유를 거부하나 모임의 확대 가능성을 암시. 정치적 압박으로 활용될 수 있음. 데이터 부분 수집 완료. 다음 단계를 지시 바랍니다."


긴 침묵 끝에 제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후퇴해. 이 정보로도 충분하다."


카이렌은 깨달았다. 이 싸움은 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장기전임을. 그리고 시데리스의 성소는 이미 단순한 모임이 아닌 함선의 균형을 흔들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음을.


마지막 빛, 그리고 어둠

제시안은 브릿지의 사령관석에 홀로 앉아 메인 스크린에서 태양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완벽한 어둠이 내렸을 때 그는 깨끗하게 정리된 시스템 상태 창을 보았다. 과거라는 부채가 사라진 완벽한 방정식. 그는 비로소 미래를 향한 항로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같은 시각 아카이브에서 아일리아는 월석이 발하는 희미한 빛에 의지한 채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사라진 태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작은 돌멩이의 빛 속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태양을 보고 있었다.


광활하고 텅 빈 우주 공간.

절뚝이며 나아가는 오디세우스호는 이제 하나의 작은 빛점에 불과했고, 그 안에서는 두 개의 다른 인류가 각자 다른 신념을 품고 기나긴 밤의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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