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희생

by 여행자 제오키

A.T. 621년 오디세우스 엔진실 지구로부터의 거리 약 42AU


불꽃.

경고등이 아니었다. 핵융합 드라이브 제어부에서 터져 나온 실제 불꽃이었다. 임시로 봉합했던 상처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왔다.

"조릭!" 카이렌이 절규했다. 함선의 핵심 동력 기술자인 조릭이 푸른 플라즈마 아크에 휩싸였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작업복이 순식간에 검게 그을렸다. 엔진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브릿지

제시안 아르코스는 홀로그램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복잡한 변수들을 훑는 스캐너와 같았다. 그때 그의 개인 통신 채널에 가장 높은 등급의 경고 신호가 들어왔다. 엔진실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즉시 응급실의 환자 현황 데이터를 스크린에 띄웠다. 이미 전쟁터였다. 지난 대탈출에서 살아남은 중상자들이 모든 침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한 침상에서 멈췄다. 늙은 역사가 에즈라. 위독하지만 안정적인 상태로 생명유지장치에 의지해 간신히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곧이어 조릭의 상태 데이터가 전송되었다. 처참했다.

"제길… 자리가 없어! 이 상태로는 5분도 버티지 못해!"

의료실 책임자의 다급한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제시안의 눈이 두 개의 데이터를 번갈아 훑었다.


[에즈라. 생존 확률 20%. 회복 후 예상 기여도 0.8%.]

[조릭. 즉각적인 조치 시 생존 확률 65%. 회복 후 예상 기여도 97.4%.]


제시안의 방정식은 1초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그는 의료실 책임자에게 명령했다.

"에즈라의 생명유지장치를 조릭에게 옮겨."

"사령관님, 그건… 안됩니다! 에즈라는 아직…"

"최종 결정권은 내게 있소. 이것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요. 명령을 이행해."

그리고 그는 아일리아의 통신 채널을 열었다. 이것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 권력자가 다른 쪽 권력자에게 내리는 차가운 통보였다.


D-7 구역

아일리아는 사람들과 함께 부서진 구역을 복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통신기로 제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지만 형식적인 예의는 갖춘 목소리였다.

"시데리스 대표.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야겠소. 엔진실 사고로 핵심 기술자 조릭이 치명상을 입었소. 함선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 생존에 직결된 최종 결정권을 내가 행사했소. 모든 분석을 통해 에즈라에게 연결된 생명유지장치를 조릭에게 재배치할 것을 명령하였소."

"…뭐라고요?"

아일리아의 손에서 공구가 떨어졌다.

"안돼요, 기다려요! 그건 합의된 절차가 아니잖아요! 당신 마음대로…!"

통신 종료. 그녀는 미친 듯이 응급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겁에 질린 사람들을 헤치며 제발 늦지 않기만을 빌었다.


참혹한 선택의 순간

아일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시간은 멈춰 있었다.

의료진 두 명이 에즈라의 침상 옆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생명유지장치를 분리하기 위한 도구가 들려 있었지만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침상 발치에는 제시안 아르코스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피투성이가 된 조릭을 침상으로 옮기던 카이렌이 굳어 있었다.

"안돼!"

아일리아의 절규가 응급실의 얼어붙은 공기를 갈랐다. 그녀는 에즈라의 침상을 막아서듯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일리아의 절박한 목소리에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해 희미하게 의식이 있던 에즈라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뿌옇던 시선이 정확히 아일리아를 찾아냈고 그녀를 알아보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났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앙상한 손을 그녀를 향해 뻗으려 애썼다.

아일리아가 그 손을 잡기 위해 절박하게 다가가는 순간, 에즈라가 마지막 숨을 쥐어짜내 단 하나의 단어를 속삭였다.

"...노래..."

제시안은 이 모든 것을 명확히 목격했다. 아일리아의 절규, 뻗어오는 손, 그 노래라는 속삭임까지. 그는 이 모든 인간적 노이즈를 외면했다. 그의 시선은 아일리아나 에즈라가 아닌, 조릭의 침상 옆에서 평탄해져 가는 바이탈 사인 모니터로 향했다.

그는 카이렌을 바라보며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행해."

카이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에즈라를 존경했다. 하지만 조릭은 그의 부하였다. 시스템은 생존해야 한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생명유지장치의 연결부를 향해 다가갔다. 아일리아의 손가락이 닿기 직전, 에즈라의 손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에즈라의 상태를 알리던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한 번 길게 울리고는 모든 것을 삼키는 침묵으로 바뀌었다. 카이렌은 에즈라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하오, 에즈라."

그리고 그는 연결을 끊었다.


전투의 서곡

아일리아는 숨이 멎은 에즈라의 손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는 막지 못했다.

그녀는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낌에 막혀 음정이 흔들리는, 극도로 불규칙하고 인간적인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와 동시에 다른 침상에서 막 연결된 생명유지장치에서 들려오는, 조릭의 생명을 증명하는 완벽하게 규칙적인 기계음이 응급실을 채웠다.


삐- 삐- 삐-


인간의 슬픔과 기계의 생존. 두 개의 소리가 잔인하게 충돌했다.


아일리아의 노래에 담긴 순수한 비통함과 분노의 힘은 제시안의 시스템을 대변하던 이들을 압도하였다. 조릭에게 응급처치를 하려던 의료진의 손놀림이 느려졌고 카이렌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돌아섰다. 그들은 차가운 논리의 집행자였지만 이 죽음의 비극 앞에 강제로 동참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그 정적 속에서 아일리아는 에즈라의 마지막 속삭임. …노래...를 떠올렸다. 그녀의 슬픔은 차가운 분노로 변모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조릭의 상태만을 확인하는 제시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진혼곡은 즉흥적으로 바뀌었다. 더 이상 슬픔의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깨진 계약에 대한 고발이자 짓밟힌 존엄에 대한 저항의 선언이었고 이제 막 시작될 전쟁의 서곡이었다.


"당신이 우리의 계약을 깼어요! 당신의 숫자가 우리의 역사를 죽였어! 우리는 당신의 부품이 아니오! 우리는… 기억할 것이오!"


그녀의 노래는 제시안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소음일 뿐이었다. 그의 귀에는 오직 조릭의 침대 옆에서 다시 안정을 되찾은 생명유지장치의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잠시 후 그의 개인 스크린에 헥사가 보낸 업데이트 로그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장기적 공동체 사기저하 확률 : +12.7%]

[신뢰도 하락으로 인한 아일리아 시데리스 세력의 잠재적 적대 확률: +9.4%]


제시안은 그 붉은 숫자들을 잠시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패드를 열어 해당 로그를 확인하고 승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태그 입력란에 단 하나의 단어를 타이핑했다.


[비용(COST)]


시스템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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