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꽃보다 향기로운 이에게,'

by 해린C

오후의 햇살이 에드윈의 눈꺼풀을 따갑게 찔러 댔다. 강렬한 빛에 저항하려는 듯 그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감긴 눈 안에서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을 때, 마침 창밖의 울새도 소리를 높여 울었다. 맑은 새소리까지 해와 합심하여 희미한 의식을 건드리자, 빛과 소리에 굴복하고야 만 눈꺼풀이 마침내 천천히 뜨였다. 어설피 모습을 드러낸 눈동자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에 말갛게 반짝였다. 에드윈은 조금 더 크게 눈을 떠 올렸다. 그는 바깥의 해를 보았다. 그리고 엎드려 누였던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에드윈은 자기 몸에 칭칭 감긴 붕대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들어 탁자에 엎드린 채 잠이 든 드와이트를 보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찾으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창밖에까지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그곳에도 그이는 없었다. 에드윈은 어깨를 떨어뜨리고 어렴풋이 서운한 빛을 머금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쉬운 눈길은 정처 없이 헤매다가, 방금 전까지 머리를 두고 누웠던 안락의자의 팔걸이에 이윽고 닿아, 거기에 핀 꽃송이 하나를 보았다. 에드윈은 종이 위에 그려진 주홍빛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참 어여쁘기도 한 금잔화.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댄 채 몸을 낮추고 앉아 손에 쥔 종이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멍하니, 꽃 그림을 보는 눈망울이 차츰 짙어졌다. 한동안 꽃을 들여다보던 그는 무엇을 참아내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짧은 숨을 내쉰 그는 고개를 폭 숙여 금잔화 꽃송이에 이마를 묻었다.




새하얀 겨울 해가 몹시도 시렸다. 에젤드는 아르르 떨며 옷깃을 여몄다. 헤즈메리에서 빌려 온 외투도 추위를 전부 다 막아 주지는 못하는 듯했다. 터덕터덕 힘 빠진 걸음걸이도 처량했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깊이 생각할 기운조차 잃어버린 사람처럼, 에젤드는 앞도 보지 않고 걸었다. 멍해진 두 눈은 그녀를 인도할 수 없었다. 익숙한 경로에 길든 두 다리가 자연히 이끌었으니 망정이지, 그렇게 걸어서는 길을 잘못 든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곁을 스쳐지나는 그 어떤 이도, 어떤 광경도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안갯속을 헤치듯 휘청휘청 걸어 집에 당도한 에젤드는 습관처럼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화덕으로 다가갔다. 무겁기만 한 손을 뻗어 솥단지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떠오른 김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설설 끓어오르기 시작한 솥에서는 채소 익는 향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맡기에 좋은 음식 냄새에도 저기 먼 곳으로 떠나 아득해진 정신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파리하게 굳어진 무표정의 얼굴로, 초점이 흐려진 눈망울로, 에젤드는 솥 안의 스튜만 마냥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마치 괴뢰사의 손놀림에 절로 몸을 움직이는 인형처럼 고개를 돌려 멀겋게 선반 위를 보고는 항아리를 집어 들어 그 안의 말린 귀리를 솥 안에 와그르르 쏟아 넣었다. 그러고는 또 멀뚱히 서서, 아무 데에나 눈길을 던져 놓고는 주걱으로 국물만 연신 휘저어 댔다.


그뿐이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눈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눈물이 고였다. 알싸한 향신료 냄새가 코끝에 스친 것도 아닌데 콧등이 찡그러졌다. 일정한 형태로 원을 그리던 주걱마저 비틀거리며 괴이한 모양을 그려 대더니 이내 눈에 띄게 느려져 갔다. 아무리 꼭꼭 씹어 다물어도 바르르 떨리는 입술은 말을 듣지 않고, 자꾸만 찌푸려지는 미간은 움찔움찔 요동을 쳤다. 앞이 보이기나 할까 싶을 만큼 눈 안에 가득 찬 눈물은 버티다 못해 결국엔 또르르, 해쓱한 두 볼 위로 죽 흘러내리고야 말았다. 한 번의 바깥출입이 허용되자 대범해진 눈물은 흑 하는 숨소리와 함께 왈칵 쏟아져 내렸다. 주걱을 쥔 손을 멈춰 버린 에젤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자 뚝, 뚝뚝. 그런다고 그만 그쳐 줄 계제가 아니니, 이번엔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뚝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느 곳에 생각이 머물러 마음이 그리도 저미나. 그녀는 그저 훌쩍훌쩍 울었다. 주걱은 손에 꼭 쥔 채로, 그렇게 울고만 있었다.


그런데,


“테사.”


준비 없이 찾아온 울음도 주체를 못 하는 지경인데, 거기에 예상치 못한 부름이라니. 에젤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추고 양쪽 뺨에 흐른 눈물을 한 손으로 쓱쓱 닦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이름만 불러 놓고 정작 그 발걸음은 잠시의 멈칫거림도 없이 에젤드의 등 뒤를 지나 곧바로 계단을 올랐으니.


하여 발소리는 멀어져 갔고, 홀로 남은 음성만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져 에젤드의 귓전으로 튀어 올랐다.


“소금은 너무 많이 넣지 마라. 지난번에 음식이 좀 짰어.”


에젤드는 물기 어린 눈을 꾸욱 눌러 감았다. 젖은 속눈썹 위로 눈물이 담뿍 번지고, 눈물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줄기의 눈물이 떠난 그 자리에 눈물이 또다시, 핑그르 차올랐다.








사랑하는 E에게,


겨울비가 내리는 날씨네요. 비가 많이 내려 땅이 질척해진 바람에 오늘은 편지를 전하지 못했어요. 내일 날이 맑다면 콜튼 선생님이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하셨어요. 그곳에도 비가 왔을까요? 날이 습해지면 추위가 뼈에 스밀 텐데, 부디 그곳의 날씨는 좀 더 맑았으면 해요.


오늘은 당신이 사무치게 보고 싶은 날이에요. 당신이 떠난 지 벌써 달포가 지났잖아요.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별별 소식들이 들려오는데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나에게는 한 달이 일 년처럼 길어요. 이곳에 당신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쩜 이렇게 가슴이 시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 없이도, 당신을 모르고도 그동안 잘만 살아왔던 곳인데 말이죠. 그렇다고 매시간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못 하고 기운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렇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면, 사실 오늘은 조금 많이 힘들었어요. 이게 다 비 때문이에요. 차라리 눈이 왔으면 좋았으련만, 이 추운 날 장대비가 쏟아지니 폭우가 내리던 그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너무 속상해하지는 말아요. 아팠던 날을 기억한다고 해도 당신과의 추억이라면 나는 정말 괜찮아요.


그날의 일에 대해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말이에요. 그땐 정말 당신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눈을 감아도 떠도 당신이 어른거리더군요. 기억 속 당신의 모습을 따라 뒤로 뒤로 걷다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의 당신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상처투성이에다가 술 냄새까지 풍기던 당신. 나는 무서워서 뒷걸음질만 쳤었죠. 하지만 당신은 명랑하기만 했어요. 친절했고, 따뜻했죠. 그런데 그런 겉모습들 말고, 그 속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헤아려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어요. 그날도 당신은 많이 아팠을 텐데. 마을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당신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다친 나를 걱정해 주면서 자기 마음은 어떻게 달래고 있었을지, 얼마나 마음이 소란스러운 밤을 보냈을지, 그런데도 그다음 날 어쩌면 그렇게도 편안하고 유쾌하게 나를 대해 준 건지. 그 모든 것이 아프고 가여워서 눈물이 났어요. 너무 무서워하지 말 걸, 너무 짧게 대답하지 말 걸. 그렇게나 잘 대해 주는데 눈치 보고 피하기만 하는 나를 고까워하지도 않았던 당신. 그게 너무 미안하고 후회가 돼서 울었어요.


어떻게 밤톨만 한 눈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질 수가 있을까요. 그런 나 자신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그전엔 울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이 아니고서는, 슬픔이 슬픔인 줄을 모르고 서운함을 서운함으로 느끼지도 못했던 내가 언제 제대로 울어 본 적이 있었겠어요. 나 때문에도 그런 적이 없는데,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던 당신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있다니요. 당신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는 걸 그땐 까맣게 몰랐으니, 아니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으니, 그런 내 모습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던 게 당연해요. 그래요.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개차반 같다는 그 왕자 때문에 내가 마음이 아파 울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러한 변화를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해요. 마치 기적처럼 느껴져요. 아니, 나에겐 그냥 당신이 기적이에요. 이것 보세요.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땐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당신과의 추억을 되새기다 보니 마음이 다시 즐거워지고 있잖아요. 나는 정말 포기하면 안 되겠어요. 또 한 번의 기적을 기대해 볼래요. 어느 날 당신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 앞에 선물처럼 나타나 줄 기적을.


그 전에, 오늘은 내가 먼저 그림 선물을 줄게요. 헤즈메리 앞뜰에 핀 수선화예요. 눈 속에서도 굳건히, 당신처럼 당당히 피어 있어요.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린 반드시 만날 거예요. 그럴 거라 믿어요.


부디 건강해요. 사랑해요.


꽃보다 향기로운 이에게,

당신의 사랑,

E

이전 27화4-9화. "나는 늪에 빠진 사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