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인의 목소리에 툴툴거리던 물레 소리가 멈추었다.
“들어오게.”
에드윈은 성형하던 도자기에서 손을 떼고 문을 바라보았다. 하인이 공방 문을 열고 들어오자 시험용 도기 조각을 들고 색감을 분석하던 에젤드도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에드윈은 얼른 옆에 놓인 물통에 손을 담가 씻고 천으로 물기를 훔친 뒤 하인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드데일 후작이 나에게 편지를?”
겉면에 쓰인 이름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펼친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중얼댔다.
“유배지에 있는 사람에게 파티 초대장이라니, 이 양반도 참 재미있는 분이군그래. 아무튼 고맙네.”
하인이 나간 후 편지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은 에드윈은 다시 물레를 돌리려 왼발을 굴렸다. 그러나 아직 젖은 흙에 손도 대기 전,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발을 멈추었다.
“아! 그래요!”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에젤드를 보며 신이 난 듯 음성을 높여 말했다.
“나 말고 당신이 가면 되겠네요!”
“예?”
에젤드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왕자님이 초대받으신 파티에 제가 어찌 갑니까?”
에드윈은 답을 하기 전 일단 자기 의자를 들고 그녀의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가 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초대장은 형식적인 것일 뿐, 메나도 백성이면 누구나 갈 수 있어요. ‘자유의 밤’,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는 팔을 뻗어 작업대 위에 놓아둔 초대장을 집고는, 접힌 종이를 펼쳐서 그 안의 크고 굵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 에젤드에게 보였다. 그가 가리킨 글씨를 들여다본 에젤드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처음 듣습니다.”
“올해로 겨우 세 번째 열리는 파티라서 그럴 거예요. 작년까지는 몇몇 지역에서 시험적으로만 행해졌고,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건 올해부터거든요. 이름 그대로 신분에 구애 받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으니, 당신도 갈 수 있어요.”
“하나 제가 가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에드윈은 미소를 머금은 채 팔꿈치를 상에 고이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증이요.”
“기증이요?”
“본래 구휼을 목적으로 한 파티였어요. 왕실 여인들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백성들에게 기부하기 위해 시행되었죠. 혹한이 시작되기 전, 궁핍한 백성들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값비싼 물건을 취하여 그것으로 겨울을 나거나 팔아서 금전을 마련할 기회를 주려는 거였어요. 처음엔 왕궁을 중심으로 한두 군데의 대도시에서만 시행되었다가, 점차 지역과 범위를 넓혀 올해에는 보다 많은 지역의 귀족들, 특히 후히 베푸는 것으로 높은 평판을 얻고 있는 귀족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사저에서 파티를 열고, 그곳에서 누구든 자기 물건을 마음껏 기증하고 또 한정된 양의 물건을 종류에 상관없이 취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어요. 받고만 와도 되는데 우리에겐 줄 것도 있으니 명분이 충분하죠. 당신에게도 기증할 것이 있잖아요. 당신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도자기 제작에 속도가 붙어서 쌓인 도자기가 서재에만도 한가득이에요. 가끔씩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 되었어요. 그러니 한번 다녀와요. 이참에 도자기도 나누고 기분 전환도 좀 해요. 당장 일주일 후인데, 시간 낼 수 있겠어요?”
“시간은 낼 수 있겠으나……. 저 혼자 다녀와야 합니까?”
“하인들도 갈 거예요. 드와이트는 왕궁 파티에 참석할 거고요.”
“아니요.”
에젤드는 어딘가 시원치 않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제 말은, 왕자님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가시지 않습니까?”
“알잖아요. 내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에젤드는 고개를 수그렸다. 풀이 죽은 얼굴로 손안에 쥔 도기 조각을 만지작만지작 뒤집고 또 뒤집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에드윈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여기에서 멉니까?”
“멀진 않아요. 데이지와 클라라의 집보다도 훨씬 가까운 곳이에요.”
“이곳에 유배령이 내려질 때, 지역 축제나 파티 참석을 금하는 영도 있었습니까?”
여느 때와 달리 추궁하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에드윈이 멀뚱히 눈을 깜박거리며 얼버무렸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에젤드가 중간에 말을 가로챘음에도 언짢음 하나 없이, 에드윈의 얼굴에는 당혹감만이 어렸다. 그녀는 눈을 동글게 뜨고 또 이어 물었다.
“전하께서 이동하시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거리이고, 참석이 금지된 것도 아닌데, 왜 불가능하다 여기십니까? 이름이 ‘자유의 밤’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드윈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찰싹 얻어맞은 사람처럼 에젤드를 빤히 보았다. 에젤드는 그의 반응을 기어이 얻어내고자 하는 듯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이기나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대로 시간만 하염없이 흘려보낼 작정인가 싶을 때쯤, 에드윈이 픽 하고 웃음을 뿜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해지더니 하하하는 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머리를 내두르는 그의 웃음소리 사이로 즐거운 목소리가 넘실넘실 밀려나왔다.
“에젤드, 당신은 정말…….”
가애가 듬뿍 물든 그의 눈길은 희맑은 그녀의 얼굴 위에 수줍은 붉은색으로 묻었다.
낮게 깔린 구름 조각들을 머금은 초저녁의 연한 하늘빛이 막 파티가 열리기 시작한 저택 위로 광활히 펼쳐져 있었다. 대문 안쪽에서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하인들과 에드윈이 힘을 합쳐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던 손수레들이 화려한 대문 앞에서 우뚝 멈추었고, 덩달아 멈추어 선 하녀들과 에젤드도 역시 고개를 쏘옥 내밀어 대문 안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여덟 사람이 놀란 것은 저택의 웅장함 때문이기도 했으며, 크고 넓은 뜰의 가장자리를 빙 둘러 끝을 모르게 줄지어 세워진 하얀 천막들 때문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사택에서 열리는 파티라고 하기에는 지역 축제를 방불케 할 만큼 큰 규모였으므로, 그중 몇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기도 했다.
“물건을 어디에 진열하면 좋을지 한번 확인해 보지.”
에드윈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대문 앞에서만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에 계십시오. 저희가 보고 오겠습니다.”
남자들이 발을 떼려 하기가 무섭게 마틸다가 먼저 발걸음을 척척 옮겨 벌써 저만치 앞서가며 말했다. 다른 하녀 역시 마틸다를 따라 천막들이 늘어선 곳으로 총총걸음을 옮겼고, 에젤드도 그들과 함께했다.
잠시 후 돌아온 세 여인이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고 알리자 에드윈과 하인들은 그녀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수레를 끌고 이동했다. 하나의 천막 앞으로 수레가 모두 옮겨진 후에, 에드윈이 하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먼저 가서 좀 즐기게. 나를 시중든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이 일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네.”
상전에게만 많은 일을 맡기고 돌아서려니 보통 어줍은 것이 아닌지라, 하인들은 그저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나 에드윈은 맑게 웃으며 그 멋쩍어하는 등들을 떠밀었다. 처음엔 주저주저하던 이들이 못 이기는 척 돌아서서는 이내 들뜬 걸음을 옮기며 흥분된 음성을 높이자 에드윈은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아직 곁에 남아 있는 에젤드를 돌아보고 말했다.
“당신도 가요.”
“저는 남겠습니다.”
“뭐 하러 그래요. 내가 하잖아요. 당신은 오늘 실컷 놀기만 해요.”
“같이 하고 싶습니다. 제작도 함께 하고, 나눔도 함께 하니, 이것도 함께 해야지요.”
한쪽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 에드윈의 입은 실상은 옆으로 잔뜩 길어지고 그 끝은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눈으로 보기에 많아 보이는 작업량이 걱정되는지 에드윈은 수레들을 쭉 훑어보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는 에젤드를 바라보며 천막 입구의 천을 걷었다.
“시작해 봅시다, 우리 일.”
툭. 튼튼한 나무 진열대 위에 도자기 하나가 엉덩이를 불쑥 들이밀어 앉았다. 마지막 도자기를 올려놓은 에드윈은 후련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천막 안의 모든 진열대들을 죽 둘러보았다. 진열대 위에 빈틈없이 올라앉은 도자기들을 보고 있자니 그득한 마음이 드는지 그의 숨이 한껏 솟아올랐다. 속을 텅텅 비워 홀가분해진 빈 수레는 그의 뒤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인데, 자리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에젤드가 난처한 표정을 한 채로 도자기 하나를 들고 멀뚱히 서 있었다. 마무리라 믿었던 것이 진짜 마무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윈도 역시 난감해졌는지 다시 한번 진열대 위를 빠르게 살폈다. 에젤드의 말대로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것을 알아챈 그는 잠시 생각했고, 이윽고 진열대 꼭대기 한가운데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촛대를 집어 들었다.
“여기가 딱 맞는 자리네요.”
그는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진짜 마지막인 도자기를 건네받았다. 자줏빛 이삭꽃이 온통 수놓인 도자기를 그 자리에 올려놓고 뿌듯한 감상을 짧게 마친 뒤, 에드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에젤드를 보고 물었다.
“어때요? 괜찮죠?”
“네, 전하. 아주 좋습니다.”
“어!”
흡족하게 웃고 있던 에젤드는 에드윈의 외마디 외침에 떨떨하게 그를 보았고, 뒤를 돌아 그녀에게 다급하게 다가가는 에드윈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깜짝 놀란 얼굴로 소곤거렸다.
“여기에선 나를 그렇게 부르면 안 돼요.”
“아!”
이번엔 에젤드가 놀란 듯 외치며 조심성 없이 말을 내뱉은 자기 입을 황급히 막았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잔뜩 당황하여 혼란에 빠진 에젤드의 표정이 퍽이나 사랑오운지, 놀랐던 에드윈의 얼굴은 금세 헤실거리는 미소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소도 잠시, 에드윈은 그 질문에 알맞은 답을 찾으려 얼른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음…….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을 때가 있더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에드윈은 살짝 숙인 허리 뒤에 한쪽 손을 올린 뒤 다른 한 손을 정중하게 에젤드의 앞에 내밀었다. 음성을 점잖게 낮춘 그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에젤드 메이 양.”
당혹스러운 듯 손바닥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에드윈은 말을 이었다.
“저는 에드윈 그랜웰이라고 합니다만.”
에젤드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를 고심하며 머뭇머뭇했지만, 이내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듯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을 향해 가는 손가락은 침착해 보였으나 가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단지 그의 둘째 손가락에만 닿도록 손가락 끝을 살며시 올려놓고는, 그가 했던 것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답했다.
“네, 그랜웰 씨.”
에드윈은 달게 웃었다. 그는 자기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톱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덮어 잡았다.
“그럼,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