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당기지 마요! 그렇지, 그렇게!”
에드윈이 찬바람을 가르며 말을 내달리는 에젤드의 뒤에서 목청을 한껏 높여 소리쳤다. 에젤드는 잉그램과 호흡을 맞추며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에드윈의 눈은 그 뒷모습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했다. 여전히 대지를 하얗게 수놓고 있는 바람꽃밭 위에서 에젤드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자, 에드윈은 슬슬 손가락을 오므려 주먹을 그러쥐었다.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에드윈이 그녀를 부르려 숨을 한껏 들이쉬며 입을 벌리는 순간, 그의 불안을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무척이나 태연한 모습으로 에젤드와 잉그램이 방향을 바꾸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드윈은 들이쉬던 숨을 곧장 뱉는 숨으로 바꾸어 쉬었다.
마음이 놓이자 양쪽 끝이 슬며시 올라가기 시작한 에드윈의 입은, 가뿐하게 반동을 주며 씩씩한 자세로 달려오는 에젤드의 모습에 어느덧 놀란 듯 점점 벌어졌다. 그녀가 여유롭게 속도를 줄여 자기 앞에 말을 멈춰 세웠을 때에는 이미 그의 얼굴 한가득히 감탄 섞인 미소가 환히 피어올라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에젤드가 땅에 발을 채 딛기도 전에, 에드윈은 등자에서 발을 빼고 있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잔뜩 높아진 음조로 말했다.
“아니, 에젤드! 어떻게 이렇게 잘 타요?”
에드윈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듯 양팔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자신을 돌아보고 선 에젤드에게 그는 계속 흥분조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면 신동 소리깨나 들었겠어요. 이제서야 배운 게 아쉬울 정도네.”
살뜰한 그의 칭찬에도 에젤드는 어째서인지 흐뭇이 웃기만 하며 그저 가만히 잉그램을 끌고 에드윈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에젤드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며 싱긋거리기만 하자,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었으나 퍽 의아해진 얼굴로 에드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선생은 나인데, 왜 당신이 날 그렇게 기특하게 보는 거죠?”
그의 물음이 당황스러웠던 것인지, 에젤드는 재빨리 미소를 거두며 되물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에드윈은 정말 모르냐는 듯 눈썹을 추켜올리며 끄덕거렸다. 에젤드는 바닥을 향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조금 전 자신이 지어 보였던 표정을 되짚어 보고는, 일단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자 말부터 꺼내 보았다.
“저는 다만…….”
그러나 자기 속에 들어앉은 마음인데도, 그 마음의 작용으로 얼굴에 드러나게 된 기색인데도 그것을 설명해 내기가 어지간히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이며 괜스레 잉그램에게 고개를 돌려서는 말마저도 어리둥절해할 만큼 별 뜻도 없이 목덜미만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없이 길어지기만 한 망설임은 아니었다. 고민은 결국 그런 채로 끝을 맺고, 잉그램을 쓰다듬던 손길을 거둔 에젤드는 그냥 담백해지기로 결심한 듯 다시 에드윈을 바라보고 말했다.
“웃으시니 좋습니다.”
그 표현 자체였을까, 아니면 말끝에 불쑥 나타난 해말간 웃음 때문이었을까. 답을 기다리고 있던 에드윈의 눈동자가 무춤 멈추었다. 처음엔 아주 잠시 말을 잊었고, 그다음엔 기절한 듯 고요해졌던 정신을 재깍 불러일으켰고, 마지막으로는 그녀의 흠쾌함이 사그라들기 전에 얼른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웃음 짓는 에젤드의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이번엔 에젤드가 궁금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고, 팔짱을 낀 에드윈은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일주일간 어떻게 지냈는지. 당신은 괜찮았던 거예요?”
“괜찮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이틀 앓고 난 후에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오늘 멀쩡히 말도 타지 않았습니까. 왕자님이 더 걱정이지요. 많이 다치셨었잖아요. 전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에드윈은 그 물음에 하늘로 천연히 눈을 돌리며 능청스럽게 답을 꺼냈다.
“그 금잔화가 말이에요.”
그는 자신의 옆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에젤드에게로 다시금 눈길을 건네며 씨익 웃고는 덧붙였다.
“그게 꽤 효험이 있더라고요.”
에젤드는 아무 생각 없이 눈만 연거푸 깜빡이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얼굴 위에 사르르 번져 가는 부끄러운 기색을 어떻게든 숨기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부끄러움을 마주했을 땐 늘 그러했듯이, 에드윈은 넉살을 조금 덜어내고 말을 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요. 신열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나도 당신처럼 한 이틀 앓고 나니 씻은 듯 나아졌고, 등의 상처도 빨리 회복되고 있어요. 다른 곳은 덜 다쳤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고요. 아까 오면서도 말했잖아요. 어제는 도자기 나눔 하러 외출도 했었다고. 그리고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에드윈은 양쪽 소매를 슥슥 걷어올린 뒤 팔을 내밀어 보였다.
“피부가 말끔하다는 거예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몸에 상처가 생겼을 때면 저도 질세라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던 피부염이 어쩐 일로 이번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지나간 염증이 남긴 반흔들과 이미 태선화가 이루어진 자국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말끔하다고 할 만한 수준으로 살갗이 깨끗했다. 그의 피부를 살피는 에젤드의 표정도 놀라운 듯 밝게 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웬일인지 그 얼굴빛은 금세 착잡한 듯 어두워졌고, 이윽고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럼 뭐 합니까. 저 때문에 더 크게 다치셨는데요.”
에젤드의 말에 덩달아 시무룩해진 에드윈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러나 가로젓는 그의 고갯짓만큼은 단호했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술을 거부했던 건 당신에게 했던 약속 때문인 게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벌어진 일의 결과를 당신이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날 도와준 거예요.”
에드윈은 에젤드가 쥐고 있는 말고삐를 쳐다보다가 슬며시 그것을 잡았다. 에드윈이 눈짓하자 그에게 고삐를 건네고 손을 놓은 에젤드는 그를 바라보며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드와이트는 분노한 어심이 누그러져 머지않은 미래에 아버지께서 나를 다시 궁으로 부르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그저 오늘의 하루를 살아 내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재기나 복귀가 아닌, 단지 평안이에요. 하루라도 빨리 신분을 잃은 떠돌이가 되어 형님의 안중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억압 받지 않는 삶을 살아 봤으면 하고요. 그런데, 그것 때문이었어요. 비극이 너무 오래 묵어서, 의지를 다지기보다는 체념하는 것이 내 버릇이 되어 버린 거예요. 세어 보니 햇수로는 6년 만이더군요. 술을 거부하고 입에도 대지 않은 게 6년 만이에요. 마음은 간절했어도 저항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일인데, 고통에 길들여져 위축되고 둔해진 나를 당신이 깨워 준 거예요.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마음만큼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또다시 나로 인해 하인들이 다치게 되면 결국 난 이전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한 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용기를 준 덕분이에요. 에젤드. 나는 당신을 결코 원망하지 않아요. 이 일에서 잘못이 있는 사람은 당신도 나도 아니에요. 반성과 자책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하는 거죠. 그러니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아요. 미안한 건…… 도리어 나인걸요.”
생각지 못한 그의 사과에 에젤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안색을 살피자 에드윈은 한동안 같은 자리에 멈추어 있었던 발을 떼어 성을 향해 걸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에젤드도 그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에드윈은 그녀의 면목을 바로 대하기가 겸연쩍은 듯 그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드와이트가 내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차일피일 미루지만 않았어도 내가 직접 얘기할 수 있었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에드윈이었지만, 에젤드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압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저라도 말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불편하시다면 굳이 저에게 전부 털어놓으셔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을, 제가 무엇이기에 마음에 그런 짐을 지고 계셨습니까.”
에드윈은 걸음을 멈추고 에젤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입을 열지는 못하고 무슨 말인가를 아꼈다.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잠시 머뭇하던 그는, 망설임 끝에 도리어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에젤드. 당신은 누구예요?”
별나기만 한 그의 질문에 에젤드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스레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에젤드의 눈을 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렸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감춰 두었던 내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어질까요. 왜 자꾸만 당신이 내 말을 조금 더 들어 주었으면, 내 맘을 조금만 더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까요. 당신은 가까워질수록 더 반갑고 더 고마운 사람, 때로는 안쓰럽고 애틋하기도 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아닌데. 분명 그게 다가 아닌데……. 어떤 단어를 더해서 당신을 표현해야 이 마음이 설명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