휭, 하고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 위에 수북이 쌓인 눈꽃을 세차게 흩트려 떨어뜨렸다. 냉랭한 눈바람은 쉼 없이 불고 또 불어 흰 눈을 이불 삼아 덮고 있는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이제는 떠나도 좋으련만, 겨울 끝자락의 엄동은 미련이 많아 쉬이 떠나지를 못하고 생명 있는 것들을 참 끈질기게도 못살게 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공방 안의 두 생명은 아주 안녕했으니. 다만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눈의 빛이 창을 통해 한가득히 들어와 에드윈의 피부가 유독 더 희게 보인다는 것, 그 때문에 새롭게 생긴 상처와 멍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는 것뿐, 그것 말고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정작 상처를 지닌 본인이 작업에만 집중해 아픔 같은 것은 느끼지도 못하는 눈치이니, 실상 문제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찬바람이 계속 창문을 두드려 대며 주의를 끌어 보려 했지만 에드윈은 물레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에젤드도 마무리 단계의 채색 작업에 몰두해 다른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붓을 내려놓고 그림을 꼼꼼히 살피던 에젤드는 그림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고는 머릿수건을 풀기 위해 팔을 올렸다. 곧 있을 그녀의 부재를 직감케 한 움직임에, 바람의 인사에도 끄떡없던 에드윈의 집중력에 빈틈이 생겼다. 에젤드를 흘끗거리는 산만한 시선 때문에 잠시 보살핌의 손길을 잃은 점토는, 그나마 수년간 도자기를 빚어 온 숙련도가 없었다면 이미 삐끗하여 형태를 잃고 뭉그러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비는 한 번 넘긴 것으로 족했던 것일까. 드르륵, 하며 의자를 밀고 에젤드가 일어서자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기라도 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드윈이 대뜸 물었다.
“벌써 가게요?”
그의 급작스러운 동작과 질문에 놀란 에젤드의 눈길은 에드윈의 얼굴에서 곧장 한쪽이 움푹 우므러져 버린 점토 위로 내리꽂혔다. 그러나 에드윈의 눈엔 그런 것쯤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시무룩하여 내리깐 그의 눈길이 향한 곳이 돌림판 위의 도자기인 것은 분명한데도, 도자기를 보고 있는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도자기가 아니었다.
“아, 그렇지……. 오늘 아버님이 돌아오시는 날이라고 했죠. 그렇죠. 얼른, 얼른 가 봐야죠.”
에드윈은 꿈적거리며 손을 닦더니 주척주척 걸어가 공방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 문고리를 잡은 채 그가 에젤드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갑시다. 늦으면 안 되니까.”
“예……. 전하.”
에젤드는 에드윈을 빤히 보며 흘려 답하고는 머뭇거리는 발을 옮겼다.
“잠, 잠깐만.”
대문 가까이로 다가가는 에젤드의 뒤에서 우물쭈물하던 에드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요.”
자신을 돌아본 에젤드를 그대로 세워 둔 채, 에드윈은 부리나케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에젤드에게로 쏜살같이 달려 나온 에드윈은 그녀의 앞에 서자마자 손에 든 것을 휙 펼쳐서 그녀의 어깨 위에 사뿐 덮어 주고는 말했다.
“날이 추워요. 이거 입고 가요.”
에젤드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그가 덮어 준 푸른색 망토를 벗어 내려고 옷깃을 잡았다.
“아니, 괜찮습니다. 지금 입은 외투도 따뜻합니다.”
하지만 에드윈은 재빠르고 단호했다. 그는 에젤드의 어깨를 눌러 잡았다.
“안 돼, 꼭 입어야 돼요. 고급 벨벳은 아니어도, 그래도 썩 질 좋은 양모로 고른 거란 말이에요.”
에젤드는 커진 눈으로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은 어색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이거 당신 거예요.”
에젤드는 더욱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기 몸을 따뜻이 감싼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파티에서 가지고 왔던 망토보다는 좀 더 연한 빛깔을 띤 푸른 망토는 에드윈의 말대로 꽤 도톰하고 톡톡히 짜인 양질의 모직인 것이 분명했다.
“당신 입히려고 옷감 끊어 와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루시가 만들었다는 거죠. 마틸다는 요리를 잘하고 루시는 바느질이 기가 막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 주고 싶었지만, 바느질 기술만 익히다가 내년 겨울이 올 것 같아서…….”
마치 독백하는 배우인 듯 여길 보았다 저길 보았다 하며 중얼중얼 장황히 말을 잇던 에드윈은 무엇 때문인지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손을 뻗어 망토의 옷깃 부분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것밖에 못 했어요.”
에젤드는 턱을 내려 에드윈이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옷깃에 수놓인 흰색 자수. 그녀는 손으로 옷을 당겨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 낸 하나의 글자를 나직이 읽었다.
“E.”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에드윈을 보았다. 에드윈이 나긋한 목소리로 그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에젤드.”
낮은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발음한 에드윈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곧 귀와 목까지 벌게진 채로, 그는 자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에젤드의 눈앞에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수선스레 말했다.
“솜씨가 영 엉망이니 너무 자세히 보지는 말아요. 루시한테 한 달을 내리 배웠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요.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주고 싶어서 부랴부랴 하다 보니 모양이 더 이상해진 거 있죠.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늦어지기만 하고……. 너무 아쉽게 됐어요. 그래도 에젤드, 겨울은 곧 끝날 테지만, 그동안에라도 입고 다녀요.”
“전하…….”
에드윈이 만류하건 말건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에젤드였다. 땀땀이 박힌 하얀 실이 수놓은 이름. 그야말로 어설픈, 그러나 맵시 있고 단아한 모양의 글자에서 에젤드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이 금세 애처로웠다. 그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망토 때문에 엄청 속상해했잖아요. 나한테는 괜히 미안해서 티도 잘 못 내고.”
에드윈은 고개를 살짝 내려 에젤드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에젤드가 마침내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단단히 일러 말했다.
“이건 당신 거예요. 당신만 입어요. 알았죠?”
힘주어 말하고 나서 끄덕이는 에젤드의 답을 받아 낸 에드윈은 곧 품속에 손을 넣었다. 무엇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자 하는지, 그는 그 안에서 꺼낸 것을 만지작거리며 깊고 긴 숨을 거듭 쉬었다.
“당신이 내게 준 금잔화를 닮았길래…….”
그는 활짝 핀 주황색 꽃송이 모양의 자그마한 브로치를 에젤드의 앞으로 가져가 망토의 옷깃에 핀을 꽂았다. 그가 바람 들 틈이 없이 옷깃을 야무지게 여며 브로치를 달아 주는 동안, 에젤드는 숨을 꼭 참고 내리깐 그의 눈동자를 가린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손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를 않아 자꾸만 비끗대는 통에 핀 하나를 제대로 고정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건 알고 있는지.
“그리고…….”
브로치를 다는 데 가까스로 성공한 에드윈이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말을 꺼냈다. 그는 에젤드의 목뒤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등 뒤에 드리워져 있던 후드를 씌워 주며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 훨씬 더 따뜻할 거예요.”
에젤드는 이제 그의 속눈썹이 아닌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하얀 설광이 비치어 빛이 한없이 옅어졌으나 아주 짙기만 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 무한한 짙음에 당황을 한 것이었나. 에드윈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피하려는 듯 열뜬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괜스레 한 번 더 후드에 공연한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죠?”
“나쁘지 않다 뿐입니까.”
양쪽 손으로 후드를 꼭 쥔 에젤드는 정색하여 말했다.
“너무 훌륭합니다. 세상 사람 누구도 갖지 못한 저만의 것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러고는 가슴에 핀 꽃을 내려다보고는 방긋이, 마음에 그득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꽃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귀엽습니다, 정말.”
그녀는 환히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눈꽃보다도 하얗게, 그녀가 웃었다. 파란 모자에 감싸인 살결과 가느다랗게 웃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망울이 흰 눈의 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그 미소에 닿은 에드윈의 눈동자 한가운데가 홀연 까맣게 부풀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듯 삽시에 멍청해졌다. 어리둥절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에젤드의 눈빛을 의식했을 때쯤에야 겨우 입가에 미소를 띠어 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멍했다.
“나,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뜨거운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목소리마저 흐리멍덩했다. 어느새 환한 웃음을 거두고 놀란 눈을 한 에젤드의 표정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이었다. 앗, 하고 에젤드가 갑자기 내지른 소리가 결국 힘없이 흘러내리던 그의 감각을 불시에 깨웠다.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이젠 떠나야겠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늦겠어요.”
“아……! 맞아. 그래, 그래요. 갑시다, 얼른.”
에드윈은 먼저 돌아선 에젤드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웬일인지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우뚝 멈추어 섰다. 몹시도 빨리 달리다가 급히 멈춘 사람처럼, 그는 손바닥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꾸욱 누르며 에젤드가 알지 못하게 큰 숨을 몰아쉬었다. 서둘러 걷는 에젤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망울이 열렬히 요동을 쳤다.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가슴을 움켜쥔 에드윈은, 달싹달싹 떨리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깨물며 걷고 있는 에젤드가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사이 그녀가 옷깃의 하얀 자수를 얼마나 여러 번이나 닳도록 어루만졌는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