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저는 즐겁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by 해린C

귀까지 먹먹해지는 적막을, 두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까만 암흑을, 노란 등불의 빛만이 환하게 터 주었다. 불빛에 의지하여 걷는 두 사람의 걸음이 자박자박 느렸다. 에젤드는 등불에 비친 에드윈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말없이 그러고만 있다가 그녀가 고개를 내려 자기 발끝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이번엔 에드윈이 그랬다. 같은 어둠 속, 같은 불빛에 비친, 같은 얼굴에 달라지지도 않는 표정인데도 싫증 날 일 같은 건 없는 듯 그렇게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걸었다.


“여깁니다.”


에젤드가 걸음을 멈추고 말하자 에드윈이 등불을 들어 불 꺼진 이층 집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늘 이 길을 걸어서 왔던 거였군요.”


하도 캄캄해서 작은 등불의 빛만으로는 얼마 비추지도 못하는 밤의 풍경을 그는 마치 훤히 보고 있는 사람처럼 휘휘 둘러보았다. 마음으로 수없이 상상해 보던 곳이라서, 그림으로 한없이 다녀왔던 곳이라서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일까. 에젤드가 걸었을 그 길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의 얼굴이 문득 멋쩍어졌다.


“생각해 보니 참 미안한 일이네요. 찾아온 건 항상 당신이었잖아요. 내가 한 거라곤 가만히 앉아 기다린 것뿐이고.”


에젤드는 등불을 들어 올렸다.


“처음 그림 그리러 갔을 때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세요?”

“글쎄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헤즈메리에 가는 일이 저에게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에젤드는 등불을 더 높이 들었다. 그녀는 그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에드윈의 눈을 들여다보며 흐림이 없이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즐겁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에드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는 몰라도, 눈동자 한 번 작게나마 움직이지 못하고 들이쉬었던 숨도 내뱉지를 못한 채, 그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귀에 담았다.


“거짓 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와 솔직하게 말하자면,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축복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저의 몫인 것이 좋아요. 제가 찾아가는 그곳에는 한결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위해 주시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화요일이면 어김없이 숲길에 나와 기다리시고, 다른 날엔 행여 제가 가서 혼자일까 나가는 걸 미루시거나 나갔다가도 일찍 들어오시는 걸 잘 압니다. 꼭 맛 보여 주고 싶은 간식을 준비해 놓으시기도 하고, 화병에 꽃이나 나뭇가지를 꽂아 공방을 장식하시는 것도요. 그런 기다림을 받는 것이 어찌 즐거움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진심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에젤드는 쑥스러운 듯은 해도 끝내는 생긋이 웃으며, 말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전하께서 저를 기다려 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숨을 꾹 참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에드윈이 그제야 소리도 나지 않게 길게 내쉬는 하얀 숨결이 어쩐지 떨리는 듯했다. 에젤드에게 조금 더 다가선 그의 어깨가 은근하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단 반 발짝. 그는 그쯤에서 발을 멈추고 다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이 뒤에 뜬 무리진 달보다 더 환했다. 에드윈이 말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몫이라면 얼마든지요. 언제든지 기다리죠. 기다리면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인걸요.”


순간이었다. 그는 에젤드의 눈 속에 물든 달빛을 보았다. 그 빛이 그의 눈 속에까지 스며들어 함빡 번졌을 때, 피어올랐던 순백한 미소가 열없이 지고, 어딘지 부끄러워진 낯빛으로 그는 길 잃은 시선의 정처를 찾아 헤맸다.


힘들여 간신히 잡아 끈 눈길을 검은빛에 잠긴 이층 집으로 흘깃 던진 에드윈은 문득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이제 들어가 봐요. 일찍 온다고 온 건데, 귀가가 너무 늦어진 것 같아 걱정이네요.”


에젤드도 그의 시선을 따라 불 꺼진 창문을 쓱 쳐다본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늦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바래다주신 것도 그렇고, 이 망토도 그렇고요.”

“날이 흐려 밤길이 이렇게나 어두운데 당연하죠. 그리고 망토는 내가 주는 것도 아닌걸요. 빈말이 아니라,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니 두고두고 잘 입어요. 다음에 올 때 꼭 입고 와요.”

“네, 전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뒤로 한 발짝 뗐다. 그리고 왜인지 흰 입김이 서린 한숨을 하, 하고 내뿜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엣말을 건넸다.


“오늘은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아요. 오늘 밤은, 생각할 것이 아주 많은 밤이 될 거예요.”


그는 헤어짐의 인사를 건네려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한데 번쩍번쩍 들어 올려 잘만 흔들던 손이 그 밤엔 왜 그리도 말을 들어 주지 않는지. 그는 마음 같지 않은 뻣뻣한 움직임에 당황해 황급히 손을 내리고는, 이윽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싱겁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요. 잘 자요, 에젤드.”





창으로 비껴드는 오후의 햇살이 몹시 따사로웠다. 혹한이 시작되기 전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겨울인데, 이렇게 따가운 햇볕에는 추운 날씨조차 몸을 사렸다. 의자에 앉아 베갯잇을 감침질하던 에젤드는 이마가 뜨끈해질 정도로 세차게 쏟아지는 빛줄기로 인해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봐도 하얀 천과 하얀색 실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빛이 덜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직 적당한 자리를 찾기도 전이었다. 그녀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잔뜩 지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온 그녀의 큰언니는 들어오자마자 외투를 벗어 에젤드가 막 일어선 의자의 팔걸이에 휙 걸쳐 놓더니 바로 그 자리에 풀썩 몸을 던져 앉고는 구두를 벗어 툭툭 내팽개치며 투덜거렸다.


“아휴, 발 아파 죽는 줄 알았네. 발가락이 어찌나 꽉 끼는지, 두 번째 데이트라 멋 부리고 나갔다가 혼났어 아주. 아이고오…… 발이야.”


에젤드는 거의 눕듯이 앉아 있는 언니의 넋두리보다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언니가 팔걸이에 던지듯이 걸어 놓은 푸른색 외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잔뜩 굳은 채 서 있었다.


들으라고 한 푸념에 아무 반응이 없자, 에젤드의 언니는 고개를 휙 올려 다른 곳에만 시선을 던지고 있는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어제 언제 들어왔어?”


마치 추궁하듯 묻는 질문에 당황한 에젤드의 시선이 외투에서 뚝 떼어져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동생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딱히 없는 듯, 그녀의 언니는 어째서인지 히쭉히쭉하며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언제 들어왔든 그게 너는 아니었겠지.”


에젤드는 점점 커지는 눈동자로 언니를 불안하게 쳐다보았으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언니는 자기 흥에 겨워 수다만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어젯밤에 말이야, 대체 누군지 집 앞에서 속닥속닥 떠들어 대는 통에 잠을 다 설쳤지 뭐야.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남자는 목소리가 매끈하고 부드러운데 여자는 너처럼 칼칼하니 쉰 소리가 나길래 처음엔 너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있니? 네가 누구한테 그렇게 종알종알 떠들 애가 아닌데. 아무튼 모르긴 몰라도 서로 엄청 좋아하는 사이인 건 분명했어. 얼마나 다정하게 속삭이는지 귀가 간지러워 못 배기겠더라. 그 재미난 걸 너도 같이 들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늦게 들어왔어?”


언니가 눈을 흘기며 나무라는데도 에젤드는 꼼짝도 못하고 그저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는 외투를 들고 벌떡 일어나서는 흥미진진해진 얼굴을 더욱 만족스럽게 붉히며 말했다.


“어쨌든 고맙다. 구두 때문에 고생하긴 했어도, 이 망토 덕분에 토머스한테 눈도장은 확실히 찍은 것 같거든. 이런 고급스러운 망토는 대체 어디에서 났대? 부자 친구가 있다더니 그 애가 준 거야? 보통 부자가 아닌가 보다? 그러니까 너, 내가 입고 나갔다고 삐치기 없기다. 너는 그런 친구 있으니까 다음에 또 좋은 거 받을 수 있잖아. 결혼 앞둔 언니한테 미리 선물했다고 생각해. 잘 관리해서 오래오래 예쁘게 입을게. 어이구, 착한 내 동생.”


언니는 에젤드의 볼을 쓱쓱 쓰다듬고는 거실 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에젤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마치 온몸이 굳어 석상이 된 사람처럼 오도카니 멈추어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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