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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Nov 21. 2022

<점이 생기게 된 이유>

식탁 소설집 2


 오랜만에 공중목욕탕을 찾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는데, 그냥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새벽 5시에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졌다.

출근시간에 늦었을 때 전해져 오는 그 특유의 등골 오싹한 기분이 잠자는 뇌를 깨웠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튕겨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입사 기념으로 옛 여자 친구가 선물해준 손목시계를 왼손에 감았는데, 시침이 아직 오른편에 있었다. 시계를 손목에 찬 채로 침대에 다시 누웠는데 허기가 밀려왔다. 어제 퇴근시간에 정 부장이 사 온 햄버거를 팀원들과 함께 먹었는데, 저녁이 너무 일렀던 모양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회사 후문에 있는 백반집에서 느긋하게 순두부찌개나 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회사 사람들과 그 식당에 가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국장과 보리밥을 먹었었는데, 메뉴판  최상위 자리에 있는 순두부찌개가 꼭 한 번은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면대에서 양치용 컵으로 대충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한 후 옷을 입었다. 구두를 신으면서 현관문 사이로 보이는 계단 쪽 창으로 밖을 보니, 비가 올 듯 동트는 새벽하늘 주황의 빛들 사이로 낮은 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신발장 한편에 아무렇게나 말려있는, 누가 샀는지 모를 3단 접이식 우산을 서류가방에 넣고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른 아침이지만 전철역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퇴근인지 출근인지 모를 사람들도 몇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방금 머리카락을 감고 온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찰구를 통과해서 플랫폼에 섰는데 고소한 커스터드 향기가 풍겨왔다. 폭신한 밀가루 반죽에 커스터드가 들어간 한 입 크기에 스낵, 만쥬라고 쓰여있는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먹어왔지만 그 이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무지는 배고픔과 닮아서 내 배는 커스터드 향기에 맹렬하게 반응했다. 갈색 모직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만쥬 한 봉지와 두유를 샀다. 울트라 마린 색 미니스커트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제법 세련된 여자였는데, 나는 만쥬를 보는 척하면서 몇 번 여자를 훔쳐봤다. 새벽 전철역에서 만쥬를 사는 여자한테 헌팅을 시도해봤자 성공확률이 0%에 가깝겠지만,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무모하리 만큼 용기가 차올랐다.

그저 말을 걸고 싶었다. 아직 말을 걸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무릎 아래가 흔들리다가 뻑뻑해졌다. 겉으로 봐서는 신중한 걸음으로 떨림을 감추며 검은 스타킹을 신은 그 여자를 향해 위대한 발걸음을 떼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아래층에 사는 흡연자였다.

같은 빌라에 살지만 당연하게도 이름은 모른다. 나와 비슷한 또래에 아침마다 출근하고, 밤이 되어 퇴근하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그저 젊은 남자다. 몇 번인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남자는 그때마다 죄송하다는 듯 깍듯한 태도로 내 민원을 접수했었다.

민원 효력은 사흘을 못 갔지만.

그런 그가 맞은편에서 빠르게 걸어오더니 그녀의 만쥬를 낚아챘다. 그는 담배를 태우던 손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입에 만쥬 하나를 구겨 넣고 그녀의 가냘픈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다시 무릎에 피가 돌았다.

와 그녀는 2-2 객차에 탔고 나는 3-1 객차에 올랐다. 객차 간 작은 출입문 창 너머로 그와 그녀의 모습이 좌 우로 일렁거렸다. 이미 임자가 있는 여자였으니 내가 패배하거나 헌팅에 실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만 편해졌다.

그와 그녀는 빈 만쥬 봉지를 구겨들고 종각역에서 내렸다.

나는 세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다.


 그의 넥타이 없는 목덜미를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다. 구 여친이 사준 시계 따위는 중고거래 사이트에 팔아 치웠어야 했다. 하긴 그 시계에 날자 표기가 없어 심플하니 좋다고 말했던 건 나였다.

백반집에는 '영업시간 오전 5시 - 오후 9시'라고 적혀있는 아크릴 표지판이 문고리에 걸려있는데, 그 앞에 직접 쓴 듯한 작고 검은 글씨로 '토 일 휴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토요일에 회사 앞까지 달려온 스스로가 뭔가 가여우면서도 바보 같았다. 게다가 순두부찌개 마저 못 먹는다니, 실망과 겸연쩍음에 공연한 담배만 꺼내 물었다.

헛헛한 담배를 반쯤 태우고 회사 정문으로 돌아 나오자, 길 건너 서울역 입구에서 어디론가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손에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나는 서울역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가는 동안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졌다. 나는 가방에 넣어둔 3단 우산을 우아하게 펴서 빗방울들을 튕겨냈다. 길 위에서 비를 피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부질없는 손짓을 하면서 종종걸음 쳤다.

나는 잘못된 요일에 잘 준비된 우산을 들고 서울역사로 걸어갔다.


 역사 안에는 공항철도 출입구 등 새로 생긴 출입구가 몇 개 있었다.

항상 지하철로만 지나다니다 보니 거의 10년 만에 들어온 서울역은 뭔가 낯설었다. 군 복무 시절 휴가와 복귀를 위해 드나들던 TMO사무실만 그대로 인 듯했다. 나는 여행객들 틈에 끼어 식당가로 이동했다. 갓 구워낸 버터를 바른 빵의 향기와 커피 향기가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순두부찌개를 먹어야 했다. 그것 마저도 못 먹는다면 오늘 하루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감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패스트푸드점 옆에 한식당 유리 쇼윈도에 모형 음식들이 6단으로 진열돼 있었다. 떡국부터 냉면까지 모든 계절의 음식이 총망라돼 있었는데, 그 속에 다행히도 순두부찌개 모형이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여 종업원이 혼자인 나를 구석 2인용 테이블에 몰아붙였다. 나는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비닐에 포장된 물수건을 꺼내 가방에 묻은 빗물을 닦고 괜히 테이블을 한 번 닦았다. 앞 테이블에는 휴가 나온 장병 세명이 새벽부터 냉면에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 혼자 어린아이 둘을 대리고 밥을 먹는 여자가 의자에서 버둥대는 여자아이의 뒷덜미를 쥐어잡은 채 갈비탕을 먹고 있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던 여자는 보채는 아아를 번쩍 들었더가 내려놓고 다시 갈비탕 국물을 마셨다. 아이가 또 발버둥치자 여자는 빨간 배낭에서 젤리 하나를 꺼내 아이의 입에 물렸다. 여자가 아이 둘을 대리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 옆으로 내 순두부찌개가 카트를 타고 나왔다.

순두부찌개는 테이블 위에서도 강하게 끓어올랐다. 뚝배기 가장자리에서 국물이 튀어 올랐다. 나는 스테인리스 컵 속에 든 찬 물을 뚝배기에 조금 부었다. 달걀노른자가 올려진 시뻘건 국물 속 연약한 두부 뭉치가 속절없이 진동했다. 회사 후문 백반집 순두부찌개는 6,500원이었는데, 그보다 비싼 이 순두부는 글쎄, 뜨겁게 목구멍을 긁는 맛과 온도 외에는 별다른 특징도 없이 비쌌다. 그래도 순두부찌개를 먹었으니 새벽의 승부는 1:1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시 지하철을 타기 전에 식후의 여유로움을 즐기고자 야외 흡연장에 들렀다. 그 새 비가 그치고 서울 치고는 맑은 공기가 산뜻한 주말 아침을 채웠다. 우산을 가방에 넣으려고 몇 번 털고 편채로 단에 올려뒀다. 화단에는 촌스러운 색깔에 꽃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담배꽁초와 종이컵들이 박혀있었다.

서울역까지 나온 김에 종로나 명동에 들러 사람 구경도 하고 쇼핑이라도 좀 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건물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돌풍으로 변해 흡연장을 덮쳤다. 재떨이 속 담뱃재가 솟구치고 바닥에 쓰레기들이 빠른 속도로 굴렀다. 담뱃재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화단에 올려뒀던 내 3단 우산이 순간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산은 바람을 타고 한참을 날아가다가 서부역 쪽 계단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같이 담배를 피우던 몇몇이 그 장면이 함께 보고 있었기에, 내 것이 아닌 양 할 수 없어서 나는 담뱃불을 비벼 끄고 우산을 주우러 뛰어갔다.

우산은 계단 중간에 내려앉아 뒤뚱거렸다. 내가 계단에 다다르자 우산은 한번 구르더니 계단 아래 인도로 바람과 함께 내달렸다. 빗물에 미끄러운 계단을 잰 거름으로 내려가니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우산은 두둥실 떠올라 펜스 너머 철로 안으로 날아가 버렸다. 내가 망연자실해 펜스 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바람을 몰고 왔던 구름에서 짧고 강한 소낙비가 쏟아졌다. 확실히 오늘은 더럽게도 운수가 없는 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연한 척 자전거 보관소 처마 밑으로 걸었다. 비는 채 2분도 안돼 그쳤는데 내 옷은 흠뻑 어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담배는 빗물에 약간 젖어 있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불을 붙이려는데 일회용 라이터 부싯돌이 빗물에 젖어 발화되지 않았다. 울화가 치밀고 짜증이 밀려왔지만 딱히 탓할 사람은 없었다. 순두부찌개를 먹어서 뱃속은 따뜻했는데 비에 젖은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주말이니까."

우산을 잃고 서있는 내 앞으로 사우나 건물이 보였다.

나는 즉흥적으로 깜빡이는 녹색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 사우나로 뛰어갔다.

찜질방과 사우나가 함께 있는 커다란 건물 입구에서 나는 사우나 이용료 7000원을 결재했다.

일단 비에 젖은 옷을 도저히 입고 있을 수 없었다. 패잔병의 갑옷같이 허물어진 자존심의 무게가 양복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구두를 벗자마자 그 옷들을 내동댕이 쳤다.

사우나 락커에 옷을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나는 타월 하나와 옷장 열쇠만 몸에 지닌 채로 사우나로 들어갔다. 따끈한 물로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니 날아가버린 우산과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 생각이 불려진 때와 함께 온탕에 흩어지는 듯했다.

동네 목욕탕이 얼마 전부터 보수공사를 하는 통에 주말 사우나를 거르고 있었는데, 기가 막힌 실수와 우연이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이라는 정신승리를 벌거벗은 몸뚱이에 새기며 씻고 불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든든한 식사와 따끈한 목욕, 니체가 그랬던가? 불행한 아침이 조금은 평온해졌다.

습식 사우나와 냉탕에 들어가기를 몇 번 더 반복하고 나는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탕 밖으로 나갔다.

 

 타올로 내 깨끗해진 육신을 말리고 있던 중에 하얀 타월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나는 전신 거울에 내 몸을 요리조리돌려가며 비춰봤다. 깡 마른 엉덩이와 부실한 허벅지 안과 밖,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체 어디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수건을 하나 더 꺼내 몸을 말렸는데 또 피가 묻어 나왔다. 천천히 몸을 돌려가며 팔을 벌렸는데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조금씩 새 나오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모기에 물린 듯 작은 구멍이 1센티미터 간격으로 두 개 나 있었다. 상처는 작았는데 그 위와 아래로 비슷한 크기의 점 여러 개가 보였다. 그중 두 개는 점으로 보이지만 상처 위에 작은 딱지가 앉은 것이었고, 두 개는 진짜 점이었다. 거울 앞에 있는 면봉으로 그 조그만 상처를 잠시 누르고 있었더니 금방 지혈이 됐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화장품을 문댔다. 일단 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사우나에서 반나절쯤 지내면서 옷을 말리고 집에 가느냐 고민하다가, 나는 사우나에 조금 더 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우나 직원에게 부탁해서 옷걸이를 하나 더 받아냈다. 젖은 양복을 꺼내 옷장 옆면에 재킷을 걸고, 그 옆칸에는 바지를 걸었다. 와이셔츠를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안쪽 레이블에 검붉은 피가 보였다. 옆구리에서 나온 피가 말라붙어 초콧릿색으로 굳었는데, 안경을 끼고 자세히 보니 세탁소에서 붙여준 확인표가 스테플러로 찍혀있던 것이었다.

확인표에는 확실히 내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나는 어쩌자고 저 확인표를 한 번도 떼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전에는 여자 친구가 다 해줬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와이셔츠를 한 번도 세탁소에 맡긴 적이 없었다.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옆구리에 점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헛헛해서 그 젖은 양복을 그대로 입고 집으로 향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전철 안에는 올 가을 처음으로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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