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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Nov 20. 2022

<만년필>

토막글

 

연필은 연필이고 만년필은 또 만년필의 역할이 있다.


에세이나 자전적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고쳐야 하거나 반드시 지워야 할 무언가가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연필은 그런 글쓰기에 적합한 도구다.


만년필은 또 만년필이다.

장거리 주자가 마라톤화 대신 등산화를 신을 수는 없듯이, 소설은 역시 만년필로 훌훌 써내려 가는 맛이 있다. 내가 쓰는 소설 나부랭이는 대부분 내 생활에서 솟아 나온 글이지만, 구라가 대부분 이기에 술술 써내려 갈 수 있다. 그 속도와 부드러움은 오직 만년필만이 해결 가능한 것이다.

컴퓨터 자판은 다른 경우다.

과거 타자기에 글자들이 꼬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판 배열은 일단 언어를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 나도 나름 타자가 빠른 편에 속하는데 뭔가를 타다다닥 쓰다 보면 생각의 속도보다 손이 빠르게 움직여서, 뱀 나오는지 구렁이 나오는지 손이 먼저 되는대로 짓거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펜촉은 제아무리 빨라봐야 내 뇌가 직할하는 영역 안이다.


 연필에 대한 탐심만큼이나 내 만년필도 각각의 역할이 세분화돼 있다.


장편소설을 원고지에 쓰고 있는데 오래 써도 손이 편하고 뭔가를 계속 쓰게끔 하는 주술적 도구가 아래의 만년필이다.

시인 김수영이 첫 월급으로 샀다던 파카 21

1940-50년대 유명했다던 파카 51의 보급형으로 내 것은 형태상으로 1948년 즈음 만들어진 모델이다. 일단 군더더기가 없고 굵은 촉이라 잉크가 부드럽게 나와서 술술 써 내려가기 좋다.


메모나 짧은 글들은 부엌 식탁이나 침대맡에서 쓰는데 그럴 때에는 휴대가 간편한 펜과 수첩을 사용한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잘 쓰지 않는다며 주신 파카 벡터 만년필인데 작아서 오래 쓰면 손이 아프지만 휴대성이 좋고 촉이 얇아서 수첩에 적합하다.


이전에 사용하던 만년필은 대학원 재학 중에 산 물건인데 사용빈도가 줄어들어 중고장터에 내놨다. 다시 보관했다가 아들에게 물려줄까 생각하고 있다.

가끔 꺼내서 그림 그리는데 쓴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장거리 글쓰기가 가능한 만년필을 구했는데 지금 택배사업소 어디쯤에 있을 거다.

몸통에 잉크를 저장하는 방식으로 글을 오랫동안 쓸 수 있다. 촉도 금촉으로 부드럽다니 기대하고 있다. 1960년대 물건이다.


연필보다야 비싸지만 역시 이것들도 다 합쳐봐야 골프모자에 골프장갑을 더한 가격 정도밖에 안 된다.

절대 퍼터나 드라이버 가격에 미치지 못한다.

다 합쳐봐야...


지난달 다녀온 원주 '박경리 뮤지엄' 작가의 집필실

저 펜과 비슷한 펜이 천리길을 달려 내게로 오고 있다.


내 것과 같은 모델인 김수영 시인의 만년필.

계속 보다 보니 내 만년필은 모조품이 아닐까 의심되지만, 술술 잘 나오니까 뭐 그냥 쓰기로 했다.

모조품이어도 나이가 70 정도 됐을 테니 엔틱이다.


마지막으로 '혼불'의 최명희 작가가 만년필에 대해서 쓴 칼럼을 첨부한다. 


최명희 작가는 생전에 몽블랑 149 만년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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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쓰는 기쁨/최명희(동칼럼) 


경향신문 1995-05-20


■ 필기도구 변화거듭


저 아득한 옛날 인류 최초의 필기도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깨어진 돌조각이나 뾰족한 나무 꼬챙이였을 것이다.  


그 날카로운 자연물 촉으로 바위 암벽과 부드러운 흙바닥 위에다 무엇인가 새기고 그리던 원시시대로부터, 손가락 끝 느낌도 경쾌한 컴퓨터 자판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이 필기 도구는 오만 가지 변화를 거듭했을 터인데.  새의 깃을 깎아서 만들어 쓰던 서양의 깃펜이나, 동양의 선비들이 문방사보로 아끼며 애지중지하던 붓들이 그 중 최근의 고전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제는 만연필까지도 아주 고색창연한 필기구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아직도 만년필로 쓰세요?』


시인들조차 워드 프로세서를 두드려 작업하는 마당에 이게 웬 일이냐고 놀라며 묻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 나는 「아직도」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만년필을 쓸 것 같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먼길을 떠나는 말에게 물을 먹이듯 일을 시작하려고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넣을 때.  그 원기둥의 혈관에 차 오르는 해갈의 신선함.  그것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리고 여러 해 묵어서 알맞게 눅은 원고용지 살 위에 만년필의 탄력 있는 금촉 부리를 찍으면, 마치 조선 백지가 검은 먹물을 흠뻑 빨아들이는 것처럼 온 몸으로 잉크를 받아 무늬를 놓는 글씨는, 육필의 문신이어서 서럽고 아픈 목숨들을 그립게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황홀하게 사로잡는 것은 만년필의 촉끝이다.  글씨를 쓰면서도 홀리어 순간순간 그 파랗게 번뜩이는 인광에 숨을 죽이곤 하는 촉끝은, 한밤중에도 눈 뜨고 새파란 불을 밝힌다.  그 비현실적인 금속성 광채가 얼마나 신비롭고 휘황한지.  나는 때때로 내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만년필 눈 아닌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온 밤을 새워 삭 삭 삭 원고지 위로 달리는 만년필의 촉 등허리 고단한 금빛이 어느 순간 푸르스름 변하는 그때이다.  나는 그 광경을 처음 본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새벽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남향진 창문 아래 책상을 놓고 일하는 나의 만년필 등허리로 미끄러지며 흐르던 새벽 이내, 그 찬연한 정기.


■ 우주와 교감에 전율


우주에 혼이 있다면 가장 깨끗하고 비밀스러운 첫 눈을 떠, 바다밑같이 검은 창문에 푸른 비늘을 일으키며 사람을 깨우는 그 빛이 이러할까.  그 푸른 빛을 받아 업은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에 전율하였다.  그것이 곧 내가 쓰는 이야기와 진정으로 합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야. 꿈 같은 소망이다.


그러나 요즘은 컴퓨터와 속도의 시대여서,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많이」 쓰고 「빨리」 쓸 수 있고, 정보를 「입력」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나한테 컴퓨터 쓰기를 권한다. 아마 나도 언제인가 컴퓨터를 쓰게 되겠지.  그리고 또 그때는 컴퓨터를 예찬할 것이다.


그러나 문득 한 번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이」 쓰고 「빨리」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사뭇 의아해진다.  너무 많은 것은 하찮아지기 쉽고, 너무 빠른 것은 놓치기 쉬운데, 인류의 역사에 무엇을 보태고자 우리는 그렇게 빨리 많이 써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보행 속도에 맞추어 살 때 가장 안정되고 알맞다고 한다.  그것을 넘어서면 몸이 시달리기 시작하는데 속도야말로 지금 우리를 편리하게 해 준다는 미명으로 가장 난폭한 횡포를 부리며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언젠가는 컴퓨터로


그냥 이렇게 문자라는 사양 산업에 종사하는 영세 수공업자로서 나는 기꺼이 아주 느릿느릿


이 현란하고 화려한 글씨의 호사를 누리려 한다.  남들이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린 자리 뒤에 남아 이삭을 주우면서.  그래서 기도를 컴퓨터로 할 수 없듯이 도저히 기계로는 할 수 없는 그 어떤 조그만 구석지 한 칸에, 한 소쿠리 언어를 주워 담으며, 그 언어마다 빛나는 금촉의 광채를 한 자 한 자 새겨 놓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만년필의 새벽은 더욱 눈부시련만.  문득 어느 절창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 가슴에 오래 남는다.


『너희들이 내어 버린 세상을 내가 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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