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가 아니라, 결혼식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
추운 겨울날, 휑한 가로수들이 늘어서 있는 상점가 앞에서 우리는 언성을 높였다.
“하. 어머니는 내가 싫다고 하는데 왜 자꾸 그 드레스를 강요하시는 거야?”
“자기가 참아 엄마가 보기에는 그 드레스가 너무 예뻐 보이셨나 봐. 너도 알잖아. 우리 엄마 주관이 뚜렷하실 뿐이지, 뒤끝은 없으신 거. 그냥 우리 결혼식이니까. 자기가 입고 싶은 거로 골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강요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 의견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고르겠어! 아직 결혼하기도 전인데 날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그리고 오빠는 왜 자꾸 어머니 편만 들어?!”
“...? 내가 엄마 편을 들었다고?”
“그래! 지금 내 앞에서 어머니를 변호하고 있잖아!! 앞으로도 이럴 거야?”
“잠만 왜 불똥이 이리로 튀는 거지? 그리고 울 엄마 진짜 뒤끝 없으셔서 정말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고르면 된다니까? 혹시 뭐라고 하시면 내가 너 편들어줄게! 너가 원하는 걸로 고르면 해결되는 거 아냐?”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어머니한테 이미지 좋은, 예쁜 며느리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단지 드레스 마음대로 못 골라서 이러는 거 같아?!”
“그럼 뭔데?”
“이익…!! 됐어! 오늘은 그만해, 나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아니 우리 가봐야 할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얘기할 것도 많은 데 무슨 시간이 더 필요해!! 지금 여기서 풀어!”
“좋은 얘기 나올 거 같지 않으니까! 여기서 그만하자고!!”
“좋은 얘기던 아니던 더 감정 상하지 말고 여기서 풀자고! 다 말해!!”
“...나 자꾸 이러면 결혼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어. 진짜 그만해.”
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튀어나온 말에 나도 놀랄 정도였지만, 그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진심이야?”
아니라고, 감정 탓에 실언했다고, 사과하면 좋게 끝날 일인데, 어쩐지 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진심이 되기 전에 더 구차하게 굴지 말고 감정 식고 나서 얘기하자고.”
“글쎄. 너가 그런 말을 쉽게 내뱉을 정도라면 나도 조금 생각이 많아질 것 같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차갑게 정색한 얼굴로 돌아서선 겨울철 길 한복판에 나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버렸다.
“...하? 그렇게 나오겠단 이 말이지? 결혼하기도 전에 이 모양이면 알만하네.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설레는 마음으로 드레스 투어를 나섰던 우리, 분명 드레스를 입어 보고 감격한 그의 얼굴을 보며 괜스레 쑥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해 수줍게 웃었던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런 꼴이었다.
행복과 서러움, 그 감정의 낙차가 너무나 컸기에 한동안 그 자리에서 씩씩거리고 있으려니, 눈에선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심이면 너랑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나쁜 놈아.’
차마 자존심 때문에 그의 앞에서 내뱉지는 못했던 말이지만,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만큼 서운한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라도 언제나 나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것을, 이미 그는 나와 함께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런 그의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시어머니도 너무나 좋으신 분이었으니, 이번에 드레스 투어에 함께해 주셨던 것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나의 가정사를 배려해 주셨기 때문이었으니까.
연애 초기부터, 불우했던 나의 가정 형편을 알아주었던 시어머니는 늘 나를 딸처럼 아껴주셨고 그런 맥락에서 오늘도 동행해 주셨던 것이다.
그런 배경까지 놓고 생각해보면 내가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골랐다고 해서 시어머니가 섭섭해 하신다거나 나무라실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스레 화목한 시댁의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과연 저 가정에 어울릴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이 자랐기에 집안의 여성 어른들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거리감도 막막했고 작은 실수 하나에, 그동안 나를 선대 해 준 시어머니가 실망하시진 않을까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생일대의 한 번뿐인 웨딩드레스를 양보할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던 것인데, 남편이 될 사람이라는 자는, 내 감정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그저, 입고 싶은 드레스를 입지 못해서 떼를 쓰는 여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게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 언성이 높아졌는데, 상대가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나버리니, 서러움은 더욱 배가 됐다.
“씨잉…. 결혼식이고 나발이고, 원래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신부대기실에서 도망치라 그랬어. 내가 어디 용서해 주나 봐라.”
속상함에 눈물이 복받쳐 올라왔지만, 그깟 놈 때문에 눈물이 흐르게 두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눈화장이 다 번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소매로 두 눈을 벅벅 문지르곤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적막이 흐르는 원룸, 한참을 울다가 화도 냈다가, 한동안 씩씩거리던 나는, 이내 제풀에 나가떨어져서는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화장대 한편에 놓인, 그와 함께 찍은 인생 네 컷 한 장.
서로 다정하게 붙어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이 지금의 나의 처지와는 퍽 달라보여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졌다.
“...저땐 저런 놈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저 사진을 찍을 때도 그렇게 사이가 좋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사진을 찍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싫은 티를 풀풀 냈고, 그런 사람을 끌고 사진 한 장 찍으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렇게 힘겹게 사진을 찍어놨더니, 막상 좋아하기는 제일 좋아해서 둘이서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든다며 차량 룸미러에 예쁘게 코팅까지 해서 걸어놓은 것을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든지.
그래도 당장은 힘들어도 둘 다 이런 작은 순간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리라.
비록 서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서 찍은 사진이지만, 사진 속 커플은 세월이 흘러도 아마 영원히 다정하게 웃고 있을 터였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때론 기쁜 건 잠시고 어려움과 인내가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함께하는 그 작은 순간들이 너무나 행복하기에 서로를 향해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런 마음.
그와 함께한 순간이 행복해서 결혼하려고 했던 것이지, 결혼식과 웨딩드레스를 위해서 결혼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 아닐 텐데, 그와 함께할 생각을 하며 웨딩드레스를 볼 때만 해도 행복에 겨워 놓고, 그가 아니라 웨딩드레스와 결혼식에 마음을 쏟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통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 뭐면 어때? 결혼식을 위해서 만난 사람도 아니고 함께 하기 위해서 하는 결혼식이잖아.”
하긴 식장도 알아보고 집도 알아보느라 틈만 나면 은행과 부동산을 돌아다녔더니, 그와 제대로 마주 앉아 일상을 나눠본 지가 언젠지도 까마득했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상을 나누는 것만 해도 마음이 즐거웠는데 서로의 관계가 발전했다는 지금, 그때의 행복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보고 싶다.”
원망의 감정은 그대로 그리움이 되어 허공에 괜한 발길질을 하고 있으려니,
띵-동.
갑작스럽지만, 왠지 뻔한 전개처럼 초인종 소리가 울려퍼졌다.
기대하면 실망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문 앞에 서 있는 상대가 누구일지 예상이 가는 바람에 현관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예상대로 문 앞에는 낯익은 실루엣의 상대가 어째선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저 모습만 봐도 이미 기분은 풀어진 지 오래지만, 괜히 퉁명스러운 척 소리를 내본다.
“...누구세요?”
“나야….”
“...그러니까 누구시냐고요. 안 볼 것처럼 하시더니, 왜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 저 말고 어머니랑 사시죠?”
“그 어머니한테 쫓겨나온 참이니까 한 번만 봐주라. 어머니가 당연히 아내 편을 들어줘야지 남자가 여자를 버려두고 혼자 집에 왔냐고 엄청 혼났어. 미안해.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결국 스스로 사과하러 오신 게 아니라. 어머니의 등쌀에 어쩔 수 없이 오셨다는 뜻?”
“그럴 리가…. 사실 이것도 핑계고 너 보고 싶어서 왔어. 잠깐 못 봤다고 엄청 보고 싶더라구. 확실히 결혼식이 뭐가 중요한가 싶고, 그런 복잡한 것들은 얼른 치워버리고 너랑 같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라.”
“흐음….”
“저녁 아직이지 않아? 딱 너가 항상 배고파할 시간인 거 같아서 오는 길에 너가 좋아하는 떡볶이 사 왔는데. 나 혼자 먹어야 하나…?”
“흥. 그런 수작에….”
“치즈까지 추가했는데?”
“...튀김도?”
“모둠으로.”
하여튼 미워할 수 없는 남자다. 내가 기분을 풀 수 있는 명분까지도 다 알고 있다. 사실 나도 핑계가 필요했을 뿐, 문 앞에 선 그를 보자마자 얼음장 같은 마음은 녹아 내린 지 오래였으니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그를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근데 어머니한테 내가 드레스로 삐졌다고 다 말한 건 아니지?”
“...”
...아무래도 2차전이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나중에는 이 기억도 언젠간 저 인생 네 컷처럼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될 터였다 ...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