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은 이기적이지만 사랑은 이타적이다. 우리의 사랑은 사랑일까 욕심일까.
“오빠는 내일 우리 데이트 때 뭐하고 싶어?”
“나? 나는 자기가 하자는 거면 다 좋지?”
“뭐야 그게~ 요즘 그럼 대답하는 남자는 인기 없는 거 몰라?”
“그런가? 그러면 우리 거의 한 달 만에 만나는 거잖아? 점심 맛있는 거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 좀 오래 하면 어때?”
“뭐어? 오랜만에 만나서 고작 카페 가자고? 대화는 전화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틀에 한 번꼴로는 하는 거 같은데?”
“...그래? 그러면 자기는 뭐하고 싶은데?”
“어휴. 됐다. 됐어. 그러면 우리 밥 먹고 영화나 보러 갈래? 이번에 ‘복수자들’ 새 시리즈 나왔잖아?”
“응…! 그러자!”
“그래 그러자. 그러면 오빠 나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잔다? 내일 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려면 일찍 자야 해.”
“벌써? 아직 9시인데? 우리 통화 5분 밖에 안했어!”
“응! 근데? 왜 더 할 말 남았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끊는다? 잘자 오빠 내일 봐!”
“...응 그래 잘 자고 사랑해?”
“응~ 내일 봐!”
내일 영화보는데 오늘도 일찍 통화를 끊으면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너무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요즘 그녀는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
침대 위에 엎드려 통화하던 나는 아쉬운 마음을 삼켜가며 짐짓 밝은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우리가 만난 지 200여 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최근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곧장 뛰어든 회사는, 나에게 있어서 이곳이 군대인지 사회인지 헷갈릴 정도로, 규칙적이고 획일적인 일상을 강요했다.
대강의 인수인계와 물어보면 건성건성 대답해주는 무책임한 사수. 자신들의 업무를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떠넘긴 주제에, 마감 기일을 지키라며 압박을 주는 상급자들. 동기들끼리의 은근한 파벌싸움. 화룡점정으로 왕복 3시간에 가까운 출퇴근 시간까지.
정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던 그때의 나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하루하루의 산뜻함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바빴던 와중에 들어온 소개팅 제의를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고 , 살기 위해 도망치듯 나갔던 그 자리에서 나는 지금의 애인이 되어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나였기에 그녀의 작은 미소 하나하나가 그렇게나 눈부셔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작은 말 하나 놓치지 않고 조심조심 반응해 주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소중했다.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내 곁에서 웃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 미소 한번을 보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그녀를 사랑하리라. 그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내 고백을 듣고 수줍게, 그리고 세상 환하게 웃어 보였을 때, 나는 정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이 정도로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경사스러운 100일 기념일에 우리의 관계를 흔들어 놓을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행복한 미소를 기대하며 손편지와 커플링, 그리고 이니셜이 새겨진 케이크와 꽃다발을 건네주었지만, 선물을 받아든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만 것이었다.
“오빠. 오빠 되게 뭐랄까…. 젊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오빠도 나도 나이가 있고 서로 직장 생활을 하는데. 고작…. 나를 향한 사랑이 이 정도였던 거야? 우리 또래의 다른 사람들은 가방이나 시계. 아니면 액세서리라도 맞춰주는 게 기본 아닐까? 친구들이 100일 선물 뭐 받았냐고 물어보면 손편지에 꽃다발 받았다고 내가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내가 받은 충격은 컸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의미를 하나하나 부여해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편지에는 그동안 그녀를 만나며 느꼈던 나의 행복과 사랑을 빽빽이 적어 두었고, 커플링에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그리고 당신은 나만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애틋함을 담았다. 이니셜이 새겨진 케이크를 주문할 때는 그녀와 케이크 앞에서, 볼에 생크림을 묻힌 채, 함께 초를 불어 기념하고픈 상상을 담았고 꽃다발은 꽃말까지 일일이 검색해가며 주문 제작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사랑보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랑할 가방과 시계가 더 중요했다는 것일까.
“...미안해. 내가 연애가 오랜만이라 감이 다 죽었나 봐. 우리 가방이나 하나 사러 갈까?”
“진짜? 실은 오빠 내가 전부터 봐놨던 게 있는데!!”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가방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차마 내 선물은 없냐는 유치한 질문은 건네지 못했다.
“오빠 나 이거 정말 가지고 싶었는데! 해해 고마워 사랑해!”
내가 사준 핸드백을 소중하게 껴안고 해맑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거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그저 내가 아직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리라, 분명 앞으로는 더욱 나아지겠지.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렇게 되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바램과는 달리 그 뒤로도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오빠 이거 좀 봐봐? 이번에 시즌 한정으로 나온 구두인데 정말 예쁘지 않아? 나랑 딱 잘 어울릴 것 같아.”
“오빠 이번에 회사 동료들한테 들었는데 우리 회사 앞에 엄청 고급스러운 오마카세 식당이 하나 생겼다고 하더라? 다들 남자 친구랑 그런데 갔다 왔다고 자랑하는데 나 부러웠어. 우리도 이번에 거기 가서 인스타용 사진 하나 찍고 오자!”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새로웠기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요구는 점점 더 심해졌다. 150일 즈음이었을까? 우리가 사귀고 나서 매일 같이하던 저녁 통화 시간에 그녀는 하품을 하며 “하아암…. 오빠 근데 우리 매일 통화하면 할 이야기도 없는데 이거 매일 해야 할까? 그냥 2~3일에 한 번씩만 하자?” 라는 말을 해왔다.
그쯤 되어가니 나도 그녀와 만나는 일이 서서히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그녀에게 원했던 것은 내 사소한 일상에 작게라도 반응해 주었던 그 소중한 모습과 자그맣게라도 웃어주던 그 소소한 미소였는데. 그것은 내게 남아 있지 않았고 끊임없이 내가 아닌 다른 걸 요구하는 그녀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하다못해 매일 하던 전화라도 이어졌다면, 난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나머지, 내가 고된 하루를 보내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설명해 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응? 오빠 혹시 그런 거야? 의처증? 으으…. 오빠 그거 고쳐야 해. 질병이야! 그리고 자꾸 나를 가스라이팅 하지 마! 진짜 숨 막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줘야지. 자꾸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는 오빠 오래 만날 수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해서, 더 원해서, 그 아쉬움을 표현했을 뿐인데,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가스라이팅 하지 말라니. 그녀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연애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남녀가 만나 함께 사랑하는 것.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가스라이팅 해서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말이 가스라이팅이지 실상은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이었다. 그 유명한 어린 왕자에도 나오는 구절이지 않은가!
내가 언제 그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난 그녀의 작은 미소 하나에 반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내게 무언갈 해주어서 사랑했던 게 아니란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내가 많은 걸 요구한다는 식으로 오히려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아파서 나는 다 커서 여자 때문에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오늘에 이른다.
나는 이제야 문제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내 사랑과 진심보다 핸드백을 사랑했다. 그녀는 나와의 대화보다 휴식을 사랑한 것이고, 구두를, 오마카세를, 직장 동료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사진 한 장을 나보다 더 사랑했다.
지난 200일 동안, 나는 그녀 안의 이기적인 욕망에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이 관계가 지속된다고 한들 무슨 희망이 있을까?
나의 목적은 그녀였지만, 그녀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관계는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희생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애로 가득한 인간이 그 마음을 차차 비워 그 자리에 상대를 채워 넣는 것, 그것이 사랑이었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상대를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포기할 수 있는 정도, 그것이 사랑의 크기였다.
말뿐만인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방과 구두를 사줄 때만 들을 수 있는 ‘사랑해’가 어떤 울림이 있을까. 내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아무런 일도 없을 때에, 매일 밤 전화기 너머로 들려주는, 서로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애틋한 ‘사랑해’였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해’는 나에게 어떤 가치도 없었고 오히려 속이 뻔히 보여 구역질이 날 뿐이었다.
상대의 마음은 잘 알았고 나는 짝사랑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아마 내일이 마지막이겠지. 그녀가 나의 사랑을 거부했을 때야 아프고 괴로웠지만, 이제는 이미 마음이 그녀에게서 떠났는지, 나의 마음은 이상하리라 만치 평온했다. 나는 차갑게 식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