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글의 무게감
"야, 담배 좀 줄이지. 하루에 두 갑이면 폐가 남아나겠냐."
편의점 계산대 너머로 상품 바코드를 찍고 있는 걸걸한 용식의 잔소리가 귓등 위를 간지럽힌다.
재상은 대꾸하지 않고 입꼬리를 약간 올리며 카운터에 카드만 내밀었다.
섬유 유연제라고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구겨지고 목이 늘어난 회색 티셔츠와
헐렁하고 얼룩이 베인 검은색 반바지, 대충 구겨신은 크록스 슬리퍼는
그의 일상을 말해주고 있다.
바삭바삭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에도 그는 세수조차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광대가 드러나 보이는 야윈 볼과 가는 팔과 다리
투박한 턱에 덜 깎인 수염이 성기게 자라 있고, 머리칼은 며칠째 감지 않아 눅진한 기름기로 눌려 있었다.
"담배가 글 쓰는 것보다 건강에 덜 해롭지 뭐."
재상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용식이 코웃음을 쳤다.
카드를 받으며 그의 손가락 끝이 누렇게 파 들어가 굳은살로 바랜 것을 힐끔 보았다
"요즘도 만년필로 글 쓰냐?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형님이 글을 알아?"
"글 좀 잘 써서 담배값이라도 벌어야지. 이 담배가 얼마짜린 줄 알아? 요즘 물가에 이거 한 보루면..."
"알아.. 알고 있어. 그래도 담배가 없으면 글이 안 써지니까.."
둘은 그렇게 자주 티격태격했다. 편의점 주인과 단골손님이라는 관계,
그러나 동네에서 서로를 가장 많이 마주치는 사이라 웬만한 가족보다 더 편했다.
용식은 재상의 생활패턴을 다 꿰고 있었다.
오전 여덟 시쯤 첫 담배를 사러 오고,
오후 세시쯤 두 번째, 그리고 저녁 여덟 시쯤 마지막으로 찾아온다.
글이 안 써지는 오늘 같은 날처럼 한 번에 담배를 사러 오는 일도 더러 있다.
재상은 카운터 옆에 놓인 로또 기계를 힐끔 보았다. 오늘따라 나열된 숫자들이 유독 선명해 보였다.
용식은 눈치 빠르게 웃었다.
"야! 그거 긁는 거보다, 네가 쓴 글이 팔릴 확률이 더 낮다."
"그러니까 내가 여길 오는 거잖아."
재상은 담배를 받아 들고 나섰다. 편의점 문이 뒤에서 띵동 하고 닫혔다.
가을 햇살은 어느 때보다 정직했다.
그의 볼품없는 민낯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지나가는 직장인들은 깔끔한 셔츠와 다림질된 바지 차림이었다.
'누구는 고개를 돌리고, 누구는 무심하게 지나치겠지..'
애써 그들 사이를 외면하며 거슬러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랐다.
서른아홉의 남자가, 민낯에 담배 한 보루와 간식을 들고 골목을 걷는 모습은 성공의 기준으로는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풍경이었다.
노량진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늘 가팔랐다. 양손에 원고 더미가 없어도 숨이 찼다.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은 출렁다리를 건너듯 발걸음에 맞춰 몸이 기웃기웃거리면서 그 울림이 전해졌다.
중간즈음 오르다 보면 창가 사이로
칠십 노부부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어머, 밥이 또 눌었네."
"괜찮아, 누룽지 먹으면 되지 뭐."
밥이 눌었다는 투정, 창문밖까지 소란스럽게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
그리고 짧은 웃음. 그런 진동들이 오히려 재상에겐 위로였다.
그는 혼자지만, 세상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방 안은 눅눅하고 어둡고 갑갑했다.
여름이 다 지나도록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갇혀 있었다.
책상 위에는 마감이 지난 원고들이 쌓여 있었고 한 두장은 선풍기 바람에 흔들거리며 손짓했다.
노트북 폴더에는 건강식품 광고 카피, 온라인 쇼핑몰 상품설명, 누군가의 자서전 대필 원고 등
다양한 이름이 바탕화면에 담겨있다.
그의 직업은 프리랜서 작가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작가라 부르지 않았다. 대필 원고, 블로그 글, 광고 카피. 남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는
문장들 속에 그는 숨어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꿈은 여전히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밤마다 빨랫줄에 널린 옷과 멀리 보이는 별을 안주삼아 옥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는 떠나간 문장들을 하나씩 잡아채 떠올렸다.
자신이 쓴 것 같지 않은 글들, 돈을 위해 억지로 짜낸 찬사들, 진심이라곤 한 줄도 없는 페이지들.
한때는 자신감이 있었다. 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할 때만 해도, 등단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진을 찍어도, 글을 써도, 그저 잉크가 번져나가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사진은 그의 취미였다.
소재를 찾는다는 핑계로, 낡은 골목과 오래된 간판을 찍었다. 서랍 안에는 인화하지
않은 필름들이 수십 통 굴러다녔다. 누렇게 바랜 글씨, 덜컹거리는 철문, 비에 젖은 벤치.
그 풍경들은 꾸밈없었다.
마치 민낯처럼, 아무도 감추지 않는 얼굴 같았다.
재상은 그런 것들에서만 안심을 느꼈다.
창문을 열고 알이 꽉 차서 불룩한 첫 담배 엉덩이를 탁탁 치며 한 개비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며 흩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문득 용식의 말이 떠올랐다.
"야,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편의점에서 담배를 건네줄 때마다 용식은 같은 말을 했다. 재상은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글쎄.. 편해진 건가..."
편하지만, 괴로웠다. 시간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누구보다 고립된 하루였다.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건
안락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건 참담했다.
그는 종종 스스로를 생각했다. 민낯으로 거리를 걷는 자신을.
예전엔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재상의 삶이었다.
'언젠가는 유명한 작가가 될 거야'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희망마저 내려놓고 메마르고 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오늘도 담배를 피웠다. 한 갑은 오후 때쯤 동이 났다.
두 번째 갑을 뜯으며 라이터를 켰다.
파란 불꽃이 담배 끝에 닿자 종이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작게 말려들어갔다.
'이 담배연기처럼 내 꿈은 점점 흩어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담배온 연기처럼 흩어진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