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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Jun 03. 2024

남의 것에는 손대지 말 것


아들은 남이다.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어서 아들의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다만 나의 것은 아들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부모 자식 간의 자동거래계약이라고나 할까. 

사랑스러운 아드님께서 바둑대회 트로피를 부모에게 안겨 줄 때 기쁨은 받고 트로피는 잘 모셔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프로 바둑기사가 된 아들이 아마추어 시절 입상한 트로피와 메달이 꽤 있다. 

트로피도 제 각각인데 어떤 것은 너무 가벼운 느낌이 나고 어떤 것은 촌스럽고 드물게 마음에 드는 것도 있지만 거의가 좀 그렇다 싶다. 아무리 형식이라지만 소장 가치가 있도록 만들면 안 되나. 

시각에 예민한 엄마는 아들의 입상내역보다  아름다운 트로피가 중요한 건가?


트로피를 정리하다가 유리로 만든 길쭉한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로 제작했다는 게 신선했지만 디자인은 조금 아쉬웠다. 다른 트로피들과 요리조리 배치해 봐도 각이 나오질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트로피가 아닌데 각인이 새겨져 있는 걸 발견하고야 트로피인걸 알게 된다. 

트로피는 딱 봐도 트로피인 게 좋은 걸까? 전혀 트로피 같지 않은데 알고 보니 트로피인 게 좋은 걸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딱 봐도 트로피인데 너무 멋있는 트로피? 

이게 꼭 트로피로서만 서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보기에 딱 화병이다. 화초를 꽂으면 더 아름다운 트로피가 될 것이다. 수경재배가 가능한 화초 몇 잎을 꽂고 물만 추가해 주니 잔뿌리가 나면서 시들지 않고 풍성한 수초가 되어 간다. 풍성해진 잎들이 입상을 축하라도 하는 것 같다. 만족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기숙사에서 귀가하는 아들이 보더니 깜짝 놀란다. 

왜 여기에 이런 걸 담아 두는 거냐고 묻는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칭찬까지는 아니어도 예기치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우승이 아니고 준우승이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트로피를 치우라고 아들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오해라도 한 걸까? 엄마는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나는 더 멋져지지 않았냐고 반문했지만 아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화초를 뺄까? 했더니 그냥 알아서 해 한다. 

애매한 표정이다.

내 것도 아닌데 맘대로 해서 미안해. 그럼 네가 잘 보관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관계에 화를 불어넣는 것이 될 것 같아 꿀꺽 삼킨다.


트로피는 트로피 여야만 하는가. 

금장 은장의 트로피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기에 술이라도 한잔 부어 마시면 좋겠다 싶은데 그런 용도가 아니라서 유독하거나 망가질게 뻔하다. 

장식장에 모셔 두면 뭐 하나. 

넣어 두었다가도 좋은 날에 꺼내어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수시로 기쁨의 날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대충 찍은 사진인데 만화 원피스의 루피 피규어가 인상 쓰고 있는 게 아들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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