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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Jun 07. 2024

나는 책상이다


아니, 책상이었었다.

자작나무 특유의 뽀얀 결이 돋보이던 단단하게 만들어진 책상이었다. 자작합판은 일반 합판에 비해 비싼 편이라서 ‘자작나무로 만들어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별개의 품목으로 불린다. 

그렇다 해도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결이 고와도 합판은 합판이지 싶어 깊은 애정은 없지만 견고하고 아름다워서 두루 사랑받는 목재이다. 

강동 리사이클센터에서 업사이클아트 작가로 작업을 하던 시절 공동작업실 작업대로 뚝딱뚝딱 성의도 없이 만들어졌던 그리고 작업실이 사라지던 날 정리 되어야 했던 물건이었다. 비싼 자작합판이었지만 무료로 생겼다는 이유로 가볍게 취급되어 책상이 되다 보니 그것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이다 보니 누구에게도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했다. 원재 자체만으로도 고급이었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과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은 가치를 논할 가치조차 없게 했다. 회원들이 작업실 책상을 만들겠다고 무료로 얻게 된 자작합판을 들고 와 성의 없이 뚝딱거릴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던 나였다. 아무리 저렴한 재료였어도 함부로 다루는 게 싫은데 자작이라니… 아깝다. 그리고 어디에 대고 하는 말인지 미안하다 말한다. 


센터 대표가 경제적 가치를 이유로 업사이클아트센터를 정리시키려는 조짐이 보이고 서둘러 작업실을 비워야 하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누구의 것이 아니었기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뿐더러 책임지고 싶어 하지도 않아서 폐기하자는 말에 쉽게 의견이 일치되었다.  분해해서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업대로 사용하던 책상이라서 본드와 물감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지만 무너진 곳 하나 없이 단단한 상태가 아까워서 도저히 그냥 버려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 튼튼한 나무구나를 연발하며 흔들어 보았지만 책상은 끄떡도 하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다. 


공동의 물건이니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겠냐고 다른 작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당연히 괜찮다고 했지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합판을 많이 자르지 않고 만든 거라서 무거웠다. 분해하는 것은 도움을 받아야 해서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며 단시간에 정리를 해야 했다. 나중에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정말 나중 문제여서 이걸 내가 가져가는 게 옳은지만 수십 번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이 무거운 쓰레기를 내 공간으로 들였을 때의 사태가 머리 위쪽의 말 풍선 안에 그려졌다. 이걸 또 왜 가져왔냐고 할 남의 편이 보지 않도록 구석에 잘 정리해 둬야 한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일단 가지고 가는 것은 번복하지 말자. 뭘 해도 될 녀석이다. 아주 빈티지한 게 좋아. 누가 나누자고 할까 싶은 마음마저 들기 시작한다. 역시 내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욕심이 생기고 만다. 피스를 뽑을 때도 연결 부분이 부서지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애지중지하며 오래되었지만 고집 세 보이는 책상을 낱낱이 해체한다. 

순발력 있게도 당장의 지혜로운 처리 방법이 떠올랐다. 근처에 가끔 가서 작업하던 목공실이 있지 않은가. 

짐으로 넣어 두기에는 눈치 보이고 원하는 사이즈로 아예 재단을 해두는 걸로 결정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림 그릴때 사용하는 트레이를 만들기 위해 설계도를 그렸다. 나무를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사이즈를 조절했다. 3단으로 된 트레이를 두 세트 만들 수 있었다. 본드 자국이 지저분해서 전체 샌딩을 하고 재단하면 수월할 텐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일단 간편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제 사이즈로 재단해 두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거기까지는 너무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록 재단한 그대로 방치되어 이거 왜 안 버리냐고 가끔 시찰하는 남의 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또 해가 바뀌고 어느 날,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옥상으로 전부 옮겨 가서 말없이 샌딩을 시작했다. 작은 조각들도 있어서 귀잖은 일이었지만 생각이 금지된 사람처럼 묵묵히 그냥 다 해버렸다. 칠이 되어 있었고 물감과 본드가 지저분하게 붙어 있어서 깔끔하게 벗기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이게 웬 헛짓거리인가. 이 아름다운 흔적을 다 지워버리다니... 일부러 만들 수 없는 세월과 작업의 흔적이 아름다워 보였다. 결코 귀잖아 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샌딩은 해야 했다. 샌딩을 해서 깔끔하게 보이는 빈티지함이 더 예뻤으니까. 설계도대로 조립하는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책상이 트레이로 변신한 모습은 새 자작나무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이대로도 좋지만 뭔가 산뜻함을 추가하고 싶다. 그래야 지금의 내 감성이다. 지하 작업실에서 묵히다 나온 냄새를 풍길 것 같은 모습 말고 버튼을 누르면 바로 최신 노래라도 할 것 같은 발랄함이 필요하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페인팅이다. 그것도 아주 가볍고 무심하게 말이다. 본래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적절한 위치이며 일부러 그렸다기엔 규칙적이지 않은 터치와 색을 추가한다. 

대단한 일을 한 것 같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인 것은 분명하다. 

과하지 않고 묵직한 분위기의 단단한 트레이는 예전에 책상이었던 것을 깜빡깜빡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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