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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Feb 15. 2022

어떤 날의 기억을 입힌 서류꽂이

셔츠가 잘 어울리는 서류꽂이


지나간 이야기들은 짧은 컷으로 사물 하나하나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의 무심한 터치로 깨어난다.

찬란한 보랏빛을 아직 간직한 셔츠를 처음 만났을 땐 아마 한눈에 반한 거겠지.

별로였다면 인연은 시작되지 않았을 거야.

남편에게 셔츠를 선물했던 추위가 시작되던 겨울의 그날이 생각난다.

화사하게 입길 바라며 꼬맹이 아들 손잡고 골랐던...

셔츠 어깨 부분에 옷걸이 자국이 날 정도로 덜미를 잡힌 신세가 되었지만 한때는 아름다웠으리라.

몇 번이나 버리려고 했다가 빈티지한 느낌이 좋아서 못 버린 옷이었다.

과감하게 버리려고 큰 마음먹고 있었는데 귀물이 나타났다.

판교 동생집에서 진행하는 미술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중에 눈길이 간 어학 패키지 박스 3개.

서류꽂이의 형태로 태어났지만 뛰어난 미모가 아닌 이유로 동생집 문 앞에 버려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안녕, 가자."

동생이 웃었다. 역시! 울 언니!


숭덩숭덩 재단도 없이 붙이고 잘라 나갔다.

이럴 때 보면 참 성의 없는 스타일이다. 왜 이렇게 귀찮을까... 근데 왜 일을 만들까. 

버릴 수는 없고 에너지는 부족하고... 그렇다. 되는대로 하는 거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박스에 제본 본드를 평평히 발라서 차곡차곡 붙여 나갔다. 

단추 있는 부분을 살릴까, 말까... 카라를 세울까, 접을까...

누구라도 한마디 해주면 도움이 될 텐데, 물어보기도 그렇고...

만들어 놓으면 와! 좋다, 이쁘다 그러지만, 만들기 전에는 눈초리들이 석연치 않아서 누구의 조언도 듣고 싶지가 않다. 패브릭 리폼 전문가가 아닌지라 대충 만들었는데 괜찮아 보인다.

대충 만들다 보니 안쪽이 지저분해서 리본테이프를 둘렀더니 고급스러워졌다.

태어난 곳은 하나지만 각기 다른 무늬를 띤 삼 남매 서류꽂이가 되었다. 

셔츠의 박음질 부분을 잘라버리지 않고 살려서 붙였더니 칸딘스키의 추상화 속 음률이 느껴진다. 

단단한 박스가 셔츠를 입고 으스대는 모습이 밉지 않다.

셔츠는 버리려던 추억을 슬며시 집어넣고는 더 기억해도 좋다 한다.

청보라 엔틱 서류꽂이에 앞으로의 이야기를 담아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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