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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김작가 Feb 15. 2022

나는 실패다


나는 실패다. 실패를 바라보다가 실패를 떠올리게 되는 게 이상하게 여겨진다 해도 실이 감겨 있는 실패보다 먼저 도착한 난감한 얼굴의 실패를 외면할 수는 없다. 빤히 들여다봐도 실패는 실패인데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은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때 집중을 어렵게 한다. 선택의 문제다. 방금 도착한 실패의 사연에 귀를 기울여 흐르는 대로 흘러갈 것이냐, 실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시작하려던 작업을 위해 본질적인 것에 주의력을 발휘할 것이냐. 참 희한하게도 진지한 태도로 몰입하려 하면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과거나 현재가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향해 흘러들어 오고 있는 것이라고 책 '노잉'에 일본작가 안도 미후유가 말한다. 방금 도착한 난감한 얼굴의 실패는 과거이고 실을 감아둔 실패가 내 앞에 선 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여기로 흘러 들어온 미래를 맞이하며 작업을 시작한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미래... 


실패는 조명이 되었고 실패이기도 하다. 실패만큼 실패를 해 본 존재가 있을까?

큰 실패일수록 안정적인 빛을 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조명을 받쳐 줄 안정된 사이즈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니 저 실패로 무엇인가를 만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름답고 견고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명을 위해 실패를 골랐다기보다는 실패에 조명을 달아 준 것에 가까울 수 있으니. 실패에는 전혀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실패의 기둥에 전선을 통과시키고 선이 지나는 길만 홈을 파줬다. 전구는 실패의 구멍에 얹으니 사이즈가 딱이어서 글루건으로 고정했다. 본래의 이쁨을 그대로 살려주고 할 일만 부여함으로써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것. 어떤 소재는 전부 분해해서 일부만을 사용하거나 잘라내어 본래의 흔적이 모두 없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변형 없이 발상만으로 변화를 줄 때 업사이클 작업의 묘미가 있다. 작업하는 과정도 수월하면서 결과는 흡족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지 않나. 있는 그대로 다르게 되는 마법 아닌 마법이 좋다. 실패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 같다.

블랙과 화이트의 북바인딩용 실이 두툼하게 감겨 있던 대용량 실패는 아직 실패로서의 삶이 창창한 존재였다.

실을 다 사용할 만큼 노트를 만든다면 북바인딩 장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고급스러운 실의 질감과 색이 좋다. 머리 위에 왕관처럼 조명을 썼어도 조심스럽지만 열심히 사용해야 한다. 가치를 다하게 해 줘야 하는 게 나의 의무인듯하니. 욕심 내고 사들인 실들이 이제는 떳떳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도 될 이유가 분명해졌다. 북바인딩 작업을 할 때만 깊숙이 넣어 둔 상자에서 꺼내어 놓던 실패는 일상용품이 되어 함께 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니 자주 사용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북바인딩 실의 매트한 느낌에 어울리는 패브릭 꽈배기 전선과 빈티지 스타일의 브론즈 칼라 소켓, 전구는 따뜻한 느낌의 LED에디슨 전구를 사용했다. 특별히 실패들을 위해서 준비한 부품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재료들의 느낌이 전반적으로 빈티지하고 매트해서 어떻게 만나도 부딪히지 않는다.

실패 없는 실패이고, 실패 겸 조명인 셈이다.

실패로 사용해도 불편함이 없고 작업대 위에 조명으로 두고 써도 좋을 이쁨을 담당하는 한쌍의 원앙이 되었다.


실패는 바늘이 꽂혀 있을때 생동감이 느껴진다. 조명이 된 실패를 그린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 어울리는 드로잉이어서 붙여 본다. 실패가 바늘을 꽂고 전사의 모습으로 섰을 때 연극무대에 선 주인공이 되어 말한다. 나는 실패다. 검정 바탕위에 흰색 실이 감긴 실패는 조명을 받은 것처럼 빛나고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거창한 해석이어야 할 말을 다 할 수 있을때가 있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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