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좌읍 하도리 뿔소라의 새둥지
비린내가 말끔히 가신 소라껍데기가
제주 해녀마을 출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때깔이 뽀예졌다.
완벽하게 이쁜 건 가짜 같다.
일부러 만들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시간만이 그려낼 수 있는 터치.
이제야 시간의 소리에 마음을 기울인다.
오미크론 확진으로 은둔 아닌 격리를 할 수 있었다.
일이 없으니 묶어 두었던 추억 보따리의 먼지를 털어 보게 된다.
왜 버리지 못할까?
무엇을 묶어 두었고 무엇을 간직하려는가.
모두 가지고 여행을 할 수는 없지 않나.
켜켜이 추억을 쌓아 이것이 엄마의 유산이란다하며 떠날 것인가.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금목걸이는 잃어버려도 소라껍데기는 잘 챙겨가지고 다녔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이상하다.
아들이 6살이던 10월이었을 거다.
버스를 타고 들어 갔던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해녀마을
버스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동네 이름과 길들이 선명하다.
신경 써서 하차해야 하니 지명도 외우게 되고 내려서 걷다 보면 계획에 없던 골목의 풍경도 만난다.
버스를 탈 때 실수로 구좌읍 도하리 가나요? 하고 운전기사님께 물어보니 아들이 옆에서 엄마, 하도리예요, 하며 킬킬거린다.
아이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계획 없이 내려갔던 열흘간의 여행은 평화로웠다.
어린 아들이었지만 어쩌면 지금 보다 더 힘이 되었던...
부담 없이 내려갈 수 있었던 건 20대에 사진 공부를 함께 하던 친구 부부가 터를 잡고 있어서였다.
언제 만나도 편한 동생 은숙이와 장난스러운 애교가 넘치는 마임예술가 강정균씨가 그리웠었다.
친구들의 터전은 해녀마을의 전형적인 집이어서 제주여행에 안성맞춤이었다.
하도리 욕실 작은 창에 조용한 바다 한 조각이 담겨 있다.
볼 일을 볼 때마다 그 한 조각을 들고 바다로 나선다.
바다는 모든 조각을 맞추어 주더라.
집에서 똑바로 쭉 걸어 나가면 바다였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만 결정하면 된다.
바람 부는 날이 많았지만 다행히 이날은 잠잠해서 걷기 좋았다.
해녀마을이어서 소라 작업 흔적이 많았는데 먹진 못했지만 뿔소라 껍데기가 수북했다.
오랫동안 바다와 교감한 흔적이 많은 뿔소라로 열심히 골라 잡았다.
껍데기만 줍는 게 꼬맹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제주의 시간을 느끼게 하는 껍데기라고 연신 감탄을 해대니 아이도 진지하게 임해준다.
주우면서 걱정이 되긴 했다.
소라 깊숙이까지 씻어 낼 수 있을까?
해물이 상했을 때 나는 썩은 내가 진동하지는 않을까?
벌레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열흘 동안 제주의 한쪽 귀퉁이에서 현지 사람처럼 바다를 들락거렸다.
사실 현지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게을렀고 해녀들은...
게으른 사람들은 제주 변두리에 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동네가 이른 시간부터 깜깜해지고 중국집도 술집도 일찍 불이 꺼진다.
몇 달 더 살면 자연에 맞추며 살게 되려나?
어쨌든 은둔보다 격리보다 더 고요한 시간, 제주에는 그런 게 있었다.
그렇게 주워 온 뿔소라 한 봉지, 아니 껍데기 한 봉지.
트렁크엔 소라 껍데기로 가득 찼다.
집에 와서 세제로 닦고 햇볕에 말리고 애썼지만 냄새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반복해서 씻고 말렸어도...
그러다 잊고 살았다.
남편이 제발 버리면 안 되겠냐고 눈치 주는데도, 이사 다니면서도 보물처럼 들고 다녔다.
눈에 안 띄게 숨겨도 놓았다가 창작소 아이들 수업할 때 한 개씩 풀기도 하고,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다 보니 말끔한 서울애가 다 되었다.
소라껍데기와 모래사장에서 주운 돌멩이들을 둥근 모양의 과자 틴케이스에 배치해서 조명을 만들었다.
틴케이스의 본래 문양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페인팅을 하고 작업했다.
뽀얀 느낌의 소라에 맞춰 밝은 핑크색을 안쪽에 칠했다.
전구만 넣으면 조명이 되는 거다.
잠들었던 제주의 추억 한 조각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