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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Nov 03. 2024

호칸과 함께한 일주일

에르난 디아스의 <먼 곳에서>를 읽고 

지난 2월부터 오늘까지 심적으로 좀 힘에 부쳤던 한 두 주를 제외하곤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읽고 내 마음을 돌아보는 글 쓰기 여정 마흔 번째다. 책을 곁에 두고 생활한 꼬박 아홉 달 동안 어느 한 주는 의무감에 가까스로 간신히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마감의 해방을 느끼기도 했고, 또 다른 한 주는 책에 매료돼 하루 중 노을이 질 즈음에는 주인공이 생각나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분명한 건 내가 미치는 생각의 깊이와 반경이 예전보다 더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가끔은 요령이란 걸 피우고 싶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작가 등을 염두에 두기보단 길이가 짧은 단편이나 일상의 가벼운 에세이 쪽으로 손이 간다. 그래서 전자책 플랫폼을 기웃거리다 초반부만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아 관둔 책도 몇 권 있다. 그래도 결국 손이 가는 책은 따로 있나 보다. 


이번 주는 에르난 디아스의 <먼 곳에서>를 읽으며 주인공인 호칸이란 남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 작가는 2017년 장편소설 <먼 곳에서> 첫 작품으로 퓰리처상과 펜/포크너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사로얀 국제상, 뉴 아메리칸 보이스 어워드 등 다수의 상을 거머쥐며 세계 문단의 혜성처럼 떠올랐다. 두 번째 장편소설 <트러스트>로는 퓰리쳐상과 커커스상을 수상했다. 나 역시 이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에르난 디아스에 매료돼 다음에는 <트러스트>를 꼭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캐릭터인 '호칸'의 여행 결말이 어떻게 끝날까 궁금해 책을 읽다 말고 가장 뒷페이지로 가서 결말 부분을 보려다 다시 되돌아간 적도 있다. 

도시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던 호칸과 그의 형 리뉴스는 자신의 고향인 스웨덴에서 아메리카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영어를 할 줄 몰랐던 소년 호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형을 잃어버리고 마는 불행이 닥친다.


출항한 게 겨울 몇 달 전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정박했을 때 호칸은 몇 살이나 늙은 모습이었다. 호리호리했던 소년은 햇볕과 소금기 어린 바람에 시달리고, 의구심과 결심이 모두 가득한 찡그린 눈살은 펴지지 않아 고랑이 파인, 거친 얼굴을 한 키 큰 젊은이가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 사람 아일린이 흑연으로 그린 지도를 살펴보고, 형과 다시 합류할 가장 빠른 방법은 육지로 통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기 위해 대륙 전체를 가로질러야 하더라도.

에르난 디아스 <먼 곳에서> p38 문학동네 세계문학/2024.04.3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여기가 어디인지 모든 게 막막한 미지의 땅에서

단 하나, 형과 함께 가기로 했던 막연한 도시 '뉴욕'으로 향하고자 했던 호칸의 혹독하고 길고 외로운 여정은

나라도 손 내밀고 싶은 정도로 딱해서 아련한 감정과 묵직한 슬픔에 가슴이 저려왔다. 


이미 황폐한 땅에 새로운 황량함이 한 겹 더 내려앉았다. 점점 늘어만 가는 칸으로 이루어진 생기 없는 평원은 여전히 똑같았다. 태양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게, 또 뭉툭하게 찔러오며 만연했다. 그 물러서지 않는 단조로움에서 달라진 것, 납작하고 점점 더 납작해져 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깊이를 갖춘 것은 단 하나, 호칸의 외로움뿐이었다. 로리머가 상자와 유리병 사이에서 시들어가는 가운데 호칸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공허감만큼 깊은 허무를 느꼈다. 

같은 책 p280


지나도 지나도 끝이 없는 사막에서 피부가 갈라지고 찢기는 호칸의 모습에 가슴 한편으론 측은지심이, 또 다른 마음엔 아름다운 사계절이 있고 전쟁과 기아가 없는 현재의 대한민국 땅에서 부모의 보호 아래 성인이 된 것인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지금 내 목전에 놓인 크고 작은 일들은 호칸이 누비던 황량한 사막에 모래알만 한 고민도 되지 않는다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래도 책 중간중간 천사들이 등장했을 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니까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돼하고 호칸을 힘차게 응원했었다. 사막 여행 중 바닥에 쓰러진 호칸을 구해준 로리머(해부학과 박제 등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살인자로 몰린 호칸을 몹쓸 보안관으로부터 구해준 에이서와 함께 난관을 극본해 가며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고대했건만 작가인 에르난 디아스는 이들 모두를 호칸의 곁에서 떠나보냈다. 

스웨덴에서 서부 개척시대 아메리카 대륙서부, 광활하고 황량한 사막과 협곡을 지나며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으로서 온몸을 다해 자연과 맞서 생을 포기하지 않는 일. 그 자체로도 그는 위대했다.  

가족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는 일, 친구와 끈끈한 우정을 쌓으며 함께 울고 웃는 일, 울타리와 둥지가 주는 포근함, 말로 표현 못할 갖가지 산해진미, 한 인간으로 태어나 어쩌면 당연시 여겼을지도 모를 내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이 이토록 고맙게 느껴지다니..... 내가 작가였다면 호칸이 더 늙기 전에 아니 생을 마감하기 전이라도 낯선 땅에 오자마자 이별한 형 리뉴스를 만나게 해 주리라.

인간이 사는데 필수 조건인 활자를, 낯선 땅의 언어를 알았더라면 호칸의 삶은 덜 외로웠을까?

문맹의 비극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도,

자연에 무방비로 노출된 호칸이 그만의 방식으로 터득한 삶의 기술을 보며 경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극한의 외로움에 처한 호칸과 나를 비교하며 나의 행복을 확인한다. 그리고 안도감에 찬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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