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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Oct 27. 2024

자꾸만 첼로가 생각나는 걸

아단 미오의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

잠시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불쑥 마음 언저리에 걸리는 그리움의 대상이 있는가?

내게는 첼로가 그렇다. 중후한 저음이 주는 그윽한 소리와 악기를 안고 있을 때 드는 안정감, 연주를 잘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멋진 게 연주하는 날이 오겠지란 막연한 기대감.

시골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오케스트라로 처음 접했던 첼로는 어린 날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던 설렘과 유년 시절 또래들과 강당에 모여 합주를 했던 행복한 기억을 불러온다. 당시 바이올린이 아닌 내 키만 한 첼로를 택했던 건 초보자들이 내는 바이올린의 찢어지는 듯 낑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저번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첼로는 초등학교 이후 손을 놓다가 5~6년 전 승진 시험에 떨어진 후 무작정 악기점으로 가 첼로를 사서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기 시작한 게 첼로와의 재회였다. 일을 다시 시작한 후 잠시 이별이지만.... 첼로는 그리움의 악기다.


오늘 소개할 책 아단 미오의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의 주인공 다치바나도 어릴 적 첼로를 배우다 직장에 다니며 첼로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순순한 마음으로 악기를 다시 배우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일본의 저작권연맹에 다니던 다치바나에게 그의 상사 시오쓰보는 어느 날 그를 지하 자료실로 불러 지시를 내린다. 대형 음악교실 '미카사'에 저작권 사용료를 징수하기 위한 스파이 프로젝트였다. 인사기록부에 첼로 연주가 특기라고 적었던 게 화근이었다.  다치바나는 '미카사'에 수강생으로 등록해 레슨 때마다 강사와의 수업을 몰래 녹음한다. '미카사'가 레슨 때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대중음악을 가르치는 법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책을 읽으며 저작권 때문에 성탄 전후 크리스마스 캐럴을 거리에서 들을 수 없게 된 현실이 새삼 슬프게 다가왔다. 또 한편으론 저작권료가 지급돼야 창작자들의 수익이 보장되니까 '양날의 검'이다.

아단 미오의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는  2023 서점대상 2위, 오야부 하루히코상, 오애부 하루히코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어릴 적 첼로 레슨을 받고 오는 길에 유괴를 당할 뻔 해 첼로를 보면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다치바나. 그런 그가 첼로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의 유희와 안정을 찾기까지의 과정, 누군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과 은둔자처럼 생활했던 주인공이 첼로로 인해 인간관계가 확장되는 모습, 그러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 고뇌하고, 결국 저작권연맹을 퇴사한 뒤 첼로를 함께 배웠던 사람들과 다시 재회하는 모습까지... 

책의 제목인 '라브카'는 심해어의 이름이자 영화 첩보원의 은어라고 한다.

첼로와 저작권이란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

"라부카는 세계에서 제일 임신 기간이 긴 동물이래. 무려 삼 년 반이나 되지. 아주 진중한 동물인 거야. 그런 점에 빗대서 영화에서는 첩보원을 라부카라는 은어로 불러.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랫동안 어두운 바닷속에 숨줌인 채 적의 정보로 배를 부풀리는 주도면밀한 스파이라는 거지"

아단 미오의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p570/2024/(주)알에이치코리아


 전 딸이 뜬끔없이 기타를 사달라고 한다. 악기를 사주면서도 내심 딸이 기타를 꾸준히 배우길 바랐다.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기타가 친구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기타 학원 등록해 줄까? 주말에 다닐래?" 호들갑을 떨며 질문을 쏟아냈지만 쿨한 사춘기 소녀는

"학원은 다니기 싫어. 유튜브 보고 배우면 돼"

"아니 처음 기본기가 중요해. 전문적으로 잘 배우면 좋잖아. 엄마가 학원 보내줄게"

"아니라니까. 그럼 부담되고 그냥 심심할 때 튕기면 재밌잖아."

유튜브에 기타 배우는 유료 앱이 있으니 그거나 결제해 달라고 한다. '요즘 애들이란... 우리 때랑 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앱 결제를 해줬다.  

느지막이 집에 들어선 어느 날 딸아이의 기타 소리가 들린다. 요즘 유행하는 팝인 거 같은데 서툴지만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기분 좋은 소리다. 오랜만에 영화 보러 극장에 가서 막 튀긴 달콤 짭짜름한 팝콘을 입에 딱 넣었을 때 사르르 녹는 그런 느낌이랄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딸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 기타 줄을 튕긴다. 지난 주말에는 딸의 기타 소리를 듣다가 1년간 세워만 뒀던 첼로를 꺼냈다.


도차우어의 연습곡을 천천히 켜자 미지금한 담수 같은 음색이 부드럽고 높게 뻗어 나갔다. 예전에 첼로 교실에서 본 샘물 그림처럼 투명한 멜로디. 티 없이 맑은 현의 울림이 작은 악기점의 천장에 닿을 듯이 솟아올랐다.
현은 가볍게. 울림은 깊게.

아단 미오의 <라부카를 위한 소나타>/p1211/2024/(주)알에이치코리아

'현은 가볍게. 울림은 깊게'를 상상하며.... 신이 나서 말이다.

오랫동안 방치한 탓에 음이 하나도 맞질 않는다. 낑낑거리며 조율을 하고 있는데 뻑뻑한 줄감개를 돌리다 A현이 뚝 끊어졌다. 그렇게 나의 첼로는 부상으로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케이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내서 악기점에 가볼 생각이다. 연습할 짬이 나지 않더라도 옛 친구와 다시 만나는 기분으로 송진을 바르고 개방현을 슥슥 긋는 그 행위를 하면서 온전한 나와 만나는 일.

지치고 마음이 복잡할 때 자꾸만 첼로가 생각나는 걸 보면 첼로는 내게 위로의 도구이다.


"콘서트에서 첫 음을 내는 순간의 뇌파는 파일럿이 이착륙할 때와 똑같은 상태래. 프로 솔리스트가 오케스트라와 공연할 때 그렇다지만, 우리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발표회가 거기에 해당하겠지"

p551


꿈꾸는 자유.

언젠가는 아마추어 동호회에 들어가 어릴 적 꼬맹이 때처럼 합주를 하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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