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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Dec 01. 2024

12월에 드는 생각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읽고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12월이란 숫자를 바라보다 유난히 빨리 지나간 것 같은 올 1년을 잠시 돌이켜본다.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하루 속에서도 어떤 날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기억조차 하기 싫지만... 이 또한 지나가니 그냥 지나온 하루 중의 한 날이었지 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2월이 되면 한 해를 마감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지나온 1년을 성찰하며 야심 찬 새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기도 한다. 나 역시 12월이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만약 이번 달이 생에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나란 사람은 어떤 식으로 기억될까? 사람이 아닌 동물로 태어났다면? 좀 엉뚱하긴 하지만 거실에 떡 버티고 있는 안마의자에 생명을 부여한다면, 안마의자는 어떤 마음으로 매일 자기에게 안기는 주인을 받아들일까? 등등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 결국에는 웃어버렸다.


영화같이 펑펑 쏟아지는 첫눈이었다. 엊그제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이상덕 선생 탄생 100주년 추모 음악회에 다녀왔다. 해방 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청주에 음악의 씨앗을 뿌린 선생은 1973년 청주관현악단을 창단해 청주시립교향악단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역의 음악을 개척해 낸 '선각자'로 불린다. 폭설을 뚫고 온 관객들 중에는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런 정보 없이 관객석에 앉아 그의 삶을 조명하는 아름다운 연주에 빠져 그의 삶을 떠올려볼 수 도 있다. 기사로만 이상덕 선생에 대한 정보를 접했던 나조차도 이날 연주회는 시작부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까지 벅찬 감동이 밀려와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다. 특히 이날 연주회의 사회를 맡은 유영선 주필님의 등장에 정말 깜짝 놀랐다. "최나경이라고 들어봤어요? 세계적인 플루티스트죠. 어떤 분은 최나경 연주를 듣고 싶어서 일본 비행기 티켓을 바꾸기도 했어요. 혹시 엄마 모시고 올 수 있으면 말해줘요. 환상적인 연주가 될 거예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이상덕 선생의 제자이자 첼리스트인 선생의 딸과 친구였다고 말하는 유 주필의 목소리에는 벅찬 감동을 꾹꾹 누르며 전하는 진심과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배어나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었다. 나 같으면 "제가 이날 연주회 진행을 맡게 됐어요. 꼭 오세요"라고 들떠서 말했을 텐데 자신은 뒤로 한채 이날 음악회에 대한 소개만 한 주필이 더욱 멋져 보였다. 더구나 일흔이란 세월을 지나그녀의 언어에는 품격과 견고함까지 더해져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연주회의 백미였던 최나경 플루티스트가 연주한 쇼팽의 녹턴은 오늘 소개할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버리자마>와도 잘 어울리는 곡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강렬한 전개와 흥미진진함은 없었지만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진한 여운과 슬픔이 아련하게 배어 나오는 책.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로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1989년도에 부커 상을 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현존하는 영어권의 대표적인 중견 작가로 꼽힌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노벨문학상에 대한 관심을 갖다 고른 책이었는데 12월을 맞이하는 시점에 탁월한 선택이었단 생각이 든다.


1990년대 후반 영국, 여느 시골 학교와도 같이 평온해 보이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일단 차단된 기숙학교 '헤일셤'. 캐시는 지금은 폐교가 된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간병사가 되었다. 어느 날 캐시는 함께 성장했던 루스가 장기 기증 후 회복 센터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를 돌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시절 자신과 사랑의 감정이 엇갈렸던, 마찬가지로 지금은 장기 기증자가 된 토미를 만난다. 캐시는 추억 속의 헤일셤에서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예술의 경이로움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 내내 그들을 사로잡았던 의혹들을 하나 둘 풀어 나간다.


'헤일셤'이란 발음 자체도 신비로웠지만 인간이 아닌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되어 온 존재인 클론들의 성과 자아 정체성, 그들의 슬픈 운명을 뒤따라가면서 스미듯 잔잔한 울림이 넓게 퍼져나갔다. 첨단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 복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시대를 살면서 책 속 내용이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캐시와 토미, 루스. 복제인간조차도 더 잘 살아내기 위한 고민을 하는데 이 세상에는 인간인데도 인간답지 못한 쓰레기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12월을 맞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그저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안식을 주는 안마의자에게까지 인간성을 부여해 보는 상상을 한 건 아마도 이 책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매년 한 번쯤은 훑어보게 되는 책 <트렌드 코리아>에서는 2025년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 중 '옴니보어'와 '#아보하'를 꼽았다.

<트렌드코리아 2025>에 따르면

소비의 전형성이 무너져 집단의 차이는 줄고 개인의 차이는 늘고 있다. 옴니보어는 원래 '잡식성雜食性'이라는 의미지만, 파생적으로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옴니보어 소비 현상은 나이와 성별, 소득, 인종에 따른 경계와 구분을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시대, 모든 전제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아보하는 불행한 것은 싫지만 너무 행복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 험한 세상, 오늘 하루 무사히 넘어간 것에 감사하며, 내일도 오늘 같기를 바라는 마음.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행복한 일이 찾아오지 않아도, 안온한 일상에 만족한다.  -출처: <트렌드코리아 2025> 중에서


경계와 구분이 사라지고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시대, 불행한 것은 싫지만 너무 행복한 것도 바라지 않고 안온한 일상에 만족한다는 #아보하의 시대, 불확실한 미래로 많은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며 부유하듯 살아갈지 모른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혼돈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작가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던 자신들이 인간이 아닌 클론인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그들만의 상실과 슬픔을 너무 요란하지 않고 담담하게 담아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묘하게 끌린다.

이 책을 읽으며 더더욱 이런 생각이 강해졌다. 나를 둘러싼 소중한 것들. 너무 완벽해지려 애쓰지 말고 힘 빼고 유연하게 살아가자란 생각.

오늘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있는데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앉는다. '무슨 일이 있나?'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내 글을 누구보다 꼼꼼히 읽어보는 엄만 "지난번 글 있잖아.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해 가끔 힘이 부칠 때 연기하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그 내용 있잖아.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묻는 엄마의 말에

"상관없어. 연기일 때도 있고, 진심일 때도 있지만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상대방이 진심으로 느끼면 그거면 됐어. 괜찮아 난..."

"그래? 여기서 세대 차이가 나는구나. 난 걱정했어. 사람들이 널 오해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딸이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에 진심을 다해 걱정해 주는 소중한 엄마가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동적인가? 12월이 시작되니 올해도 다 끝나가는 게 실감 난다. 바삐 살아가다 책 한 권 읽고 마음 가다듬으며 숨 한 번 쉬어가는 인생. 다가올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몹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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