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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Dec 08. 2024

머뭇거림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고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 씀씀이는 언니 같을 때가 많아 가끔 속 마음을 털어놓는 아끼는 후배가 있다. 마침 후배네 회사서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공연을 주최한다고 해서 망설임 없이 티켓을 구매했다. 어릴 적 따뜻하고 평안했던 기억을 가족들에게도 느끼고 해주고 싶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쯤일까? 엄마 손에 이끌려 괴산 읍내에서 공연을 보기 위해 청주로 오는 길은 참 멀고도 지루했다. 차멀미를 잊기 위해 차창 밖 앙상한 겨울나무에 얹혀있는 까치집을 하나 둘 셋 세면서 외국 소년들의 모습을 상상했던 어릴 적 나. 처음 들어본 미성은 오는 여정의 지루함을 까마득히 잊게 했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작고 하얀 얼굴의 금발 머리 소년들이 '미야옹~야옹~미야옹'을 노래하던 그 순간은 성인이 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제법 겨울을 실감케 하는 오늘, 가족들과 함께 로시니의 고양이를 다시 한번 듣게 될 줄이야. 어린 소녀가 느꼈던 감동은 수 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사실 오늘 공연을 볼 수 있을까 고민이 참 많았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혼돈의 지난 며칠을 보낸 탓이어서 한가롭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맞는 걸까? 하면서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폭탄을 맞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국민들도 있을 테고, 밤사이 벌어진 엄청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뒤늦게 차오르는 분노를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입 밖으로 자기의 생각을 내비치기 무서운 세상이다. 자신의 평범한 일상조차 드러내기 무서운 세상이어서 공연을 보러 가는 게 맞나 머뭇거렸다. 가수 임영웅은 탄핵 선거날 자신의 강아지 생일 사진을 sns에 올렸다 일부 시민들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은 세상이다. 어떤 이는 겉으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면서도, 교육청이 비상계엄 해제 당일 김장 봉사를 했다고 막가파식으로 싸잡아 공격을 이어가는 세상이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말을 아끼고 삭혀야 하는 세상이다.

친한 후배에게 카톡을 넣었다.

"세상이 너무 극과 극으로 가잖아. 무서워서 뭘 못 하고 살겠어. 내가 이상한 거니?" 문자로 된 내 카톡에는 화가 넘쳐났다. 후배의 답글을 받고 나서야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묵묵히 각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죠. 청주상의는 연탄을 배달했고, 어떤 사람들은 장학금을 기탁하고, 헌혈도 하고 성금도 하는 거죠...."

"넌 나의 안정제야"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골랐다. 故이윤기 작가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이 책은 번역가이자 소설가, 신화학자로 전방위적 활동을 한 작가의 남긴 유일한 산문집이다.

작가는 "땀과 자유로 범벅이 되게 써라"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라는 질문을 나는 자주 받는다. 내가 글을 잘 써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이 아니고, 글 쓰는 일을 아주 직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은 되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되풀이해서 쓴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p93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은 된다고 하던데, 난 생각나는 대로는커녕 말하고 싶은 대로 조차 쓰지 못하니... 무엇이 두려운 걸까? 입 밖으로 꺼낸 말이 독이 되고 무기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는 요즘.

혼돈의 시대, 자유롭지 못하다. 머뭇거림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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