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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Nov 24. 2024

배우를 꿈꿨던 때도 있었지

신용욱의 <배우라는 세계>를 읽고

잊고 있었다. 한 때 나도 배우를 꿈꿨었다는 걸...


고3 6월쯤이었던가? 사설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인 서울이 아닐 바에는 뭔가 파격적인 인생을 살아봐야 지란 막연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연기란 걸 해보면 어떨까? 하고 부모님을 졸랐다.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던 탓일까? 반대를 할 법도 한데 부모님은 순수히 내 뜻을 존중해 주셨다. 갑작스레 문과에서 예체능계로 진로를 바꾸고 여름방학에 서울 연기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연기는 고사하고 그저 서울과 청주를 오가는 경험 자체가 특별하고 신기하던 그 시절. 주말에는 서울로 학원을 다니고 주중엔 아빠 지인분의 소개를 받아 청년극단이란 곳에 수습생으로 들어갔었다. 그저 연기가 좋아 자발적으로 극단 생활을 하던 또래들과 달리 누군가의 소개로 극장에 발을 디뎠던 난 그들에게 이방인과 같았다.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란 작품으로 소극장 무대에 처음 섰던 기억이 난다. 조연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행인 정도였던 거 같은데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의 공허함과 소극장의 먼지 냄새, 꿈을 향해 나름 진심이었던 방황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워낙 연기에 문외한이다 보니 몇 개월 만에 대학에 가기 위해 속성 연기 과외를 받기도 했다. 지금 방송사 PD로 있는 A와 드문드문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 B와 함께 셋이 수업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걱정 없이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수업에 임했던 그 시절이 나의 리즈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안톤체호프의 <갈매기> 니나 역으로 실기시험을 봤는데 작품 해석은 고사하고 그냥 대사 외우기에 급급했던 것 그때. 실기는 형편없었지만 비교적 수능 성적이 좋아 연극영화학과 입학에 성공했다. 학교 생활은 제대로 못 했어도 아직 우리 과 노래가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연영인의 정신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이 예쁘다고 욕하지 마라! 우리는 연극영화학과~ 야~야~야~야~" 푸하하하하 이 노랠 그렇게 목이 터져라 진지하게 불렀었다니...... 연극영화학과에 입학만 하면 뭐든 될 줄 알았다. 그런데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고비가 찾아왔다. 담당 교수님 왈 "넌 얼굴이 연예인처럼 예쁘지 않아 주인공을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연기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어서 조연을 하기에도 살짝 어중간해.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방송국 시험공부나 해봐" 가만히 교수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고 순수히 받아들여지는 거다. 내가 생각해도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라 신기하게도 단박에 포기가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연기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학 생활을 하면서 집에 부도가 났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학교 생활과 옛 나의 꿈과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연기는 아니어도 남 앞에 서서 표현하길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난 결국 2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별정직 공무원이 됐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연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우리 방 회의 시간에 나도 모르게 상대방 흉내 내길 즐겨하고, 정말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면 가끔 스스로 주문을 걸기도 한다. '오늘 하루는 너에게 펼쳐진 무대야.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깔끔히 연기한 뒤 무대 밖에선 훌훌 털어버리자'라고...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꼼짝달싹 하기도 싫어 방에 누워 책을 뒤적거리다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배우라는 세계> 신용욱 지음.

'아 맞다. 나도 한 땐 배우라는 걸 꿈꿨었지.'

지난 스무 살의 나와 마주하다.

강동원과 원빈, 윤소이, 한지민 등 유명 배우의 연기 선생님인 신용욱이 툭툭 대사를 내뱉듯 써 내려간 에세이. 연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중 어떤 습관은 오히려 강박이 되어 연기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기도 했고
또 어떤 습관은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물론 습관이라는 걸 규격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각 개인에게 맞는 습관은 분명히 존재한다.
연기 선생은 연기가 흥미로운 작업임을
배우들에게 매 순간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 흥미를 바탕으로 연기력을 발전시키는 '습관의 발견'과 '묵묵한 실행'은
배우의 몫으로 넘겨주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는 좋은 습관을 찾는 일은 결국 그들 자신의 몫인 셈이다.
신용욱의 <배우라는 세계> p229 출판사 부키


서울 출장을 왔다. 집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이 시간이 좋다. 아직 수행이 덜 되서인지 좀 전까지만 해도 회사 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다시 내려오길 반복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은 또 다른 캐릭터로 연기 중이다'라고 맘을 고쳐 먹으면 편안해지기도 한다.

인생이란 무대, 거의 대부분 진심을 다해 순간순간을 살고 있지만 가끔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땐 내가 아닌 또 다른 부캐로 대학 때 배웠던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리얼리즘 연기를 하곤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무대의 조명은 꺼지기 마련이니까.


배우가 모니터링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과 마주 서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신인 배우가 건성으로 모니터링을 하면서 자신과의 만남을 회피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감담하기 힘들어서다.

같은 책 p51


그리고 가끔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현재의 자신과 마주 서보자.

"인생 별 거 없음"

창 밖에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빛난다. 좋다. 서울의 밤이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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