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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이러니

최승호의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by 임가영

아이들이 어릴 적엔 함께 서점을 자주 갔다. 그런데 요즘은 사춘기에 접어든 남매와 함께 외출을 하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내 손을 꼭 잡고 엄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맹목적인 사랑의 크기가 작아진 만큼, 세상을 향한 관심이 더 커진 아이들이 대견하다가도 내심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지난 주말에는 방구석에서 꼼짝도 하질 않는 아이들을 꼬셔 동네 서점을 갔다. 방학이라고 하루 종일 놀지만 말고 하루 한쪽이라도 좋으니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강압(?)에 못 이겨 모처럼 나들이에 나섰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 때까지만 해도 서점에서 책 사고 돈가스와 우동을 먹는 게 필수 코스였는데 추억의 맛집은 사라지고 공사 중이란 팻말만 휑하니 붙어있다. 온라인 독서 플랫폼을 정기 구독 한 뒤부터는 마음 내키는 대로 무작정 책을 사지 않고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사지만 아이들이 고른 책은 무조건 사주는 편이다. 14살 아들이 고른 책은 최승호 작가의 시집 <눈사람 자살 사건>. '자살'이란 단어에 흠칫 놀라다가 작가 프로필을 보고 안심이 됐다. 동시집을 5권이나 낸 시인이니 아이와도 잘 통할 것 같았다.

최승호 시인은 『대설주의보』,『세속도시의 즐거움』,『아메바』등의 시집이 있고 방시혁과 작업한 동요집, 뮤지와 작업한 랩동요집 등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작가이며, 현재는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시 창작 강의를 맡고 있다. 청소년 도서 코너에서 몇 권을 추천해 주니 "그건 유치해" 라며 아들이 고른 책이다. 품 안에 자식이 점점 멀어져 간다.




늦은 밤 잠자리에 "엄마는 아직도 아빠랑 사랑을 나눠?"라고 묻는 14살 아들의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졸다 말고 잠이 확 깼다.

"아들. 네가 사랑을 알아?"

"그럼 알지. 나도 알아. 유튜브 같은 데서 봤어. 나도 이제 중2 되는데 알지."

"너 그럼 혹시 야동 같은 것도 봤니?" (뜬금포 같지만 정말 궁금해서)

"풋풋" 말 되신 크득크득 웃는 아들의 표정이 귀여우면서도, 물꼬가 터진 호기심 청년의 야밤 질문 세례는 정말 날 진땀 나게 했다.

"엄마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나머지는 아빠 한테 자세히 물어봐. 자자"

"아빠한테 묻긴 좀 그래."

자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슬며시 모자간 대화에 끼어 거든다. "엄마 내가 봤는데 오빠 연애 웹툰 보면서 무지 좋아했어."

이 분위기를 좀 진정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눈 감어. 감고 들어"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햐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 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눈사람 자살 사건> 최승호/ p14 1판 22쇄 발행 2024/12/15 (주)달아출판사


"엄마 재밌는데 슬퍼. 슬픈데 재밌어."

"그래 그게 인생이야. 재밌는데 슬프고, 슬픈데 재밌는, 인생은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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