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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봄날이 오길

황선엽 교수의 <단어가 품은 세계>를 읽고

by 임가영

한 권의 책을 골라 일주일 동안 읽고, 책 속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글 쓰는 일을 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나갔다. 호기롭게 시작한 처음 몇 달은 에너지가 넘쳐 힐링이 되었지만 반년이 지났을 즈음엔 체력에 부쳐 그만둘까도 했었다. 하지만 꾸준한 독서가 삶의 루틴이 된다면 5년, 10년 뒤쯤에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꼭 멀리 보지 않더라도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시작하길 참 잘했고, 그만두지 않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주는 책장을 덮고 그 여운이 가시기라도 할까 봐 단어와 문장이 노트북 속에서 춤을 췄지만, 어떤 주는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어도 덤덤할 정도로 동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배울 점은 있다. 취향과 관점의 차이, 수준의 차이가 날 뿐.

무엇보다 부족한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내가 이렇게 아이처럼 좋아할 줄 몰랐다. 어제는 여성단체협의회 신년 인사회가 열려 교육감님 축하말씀을 모니터링하려고 뒤편에서 앞쪽으로 가는데 한 분이 내손을 꼭 잡으신다.

"글 잘 읽고 있어요. 한 편도 빠지지 않고 다 읽었어요."(미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폭신한 손에서 짧지만 강렬한 온기를 느낀다. 이 맛이다.

그런데 피드백의 부작용.

내 글을 한 편도 아니고 다 읽었다고 한 말을 듣고 나니 내 마음에 '부담'과 '욕심'이란 놈이 들어왔다. 남을 의식하는 순간 그 글은 뻔하고 글맛은 떨어지기 마련인데, 욕심이 앞서니 한 자도 나아가지 못하고 노트북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이주에 읽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황선엽 교수가 지은 <단어가 품은 세계>도 더 잘 쓰고 싶은 이유에서 고른 책이다.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수업>이란 부제를 보고 나의 욕심과 욕구는 더욱 강해졌다. 서울대생처럼 배우고 싶었다. '그래 난 어휘가 부족해. 기사체처럼 딱딱하게 쓰지 말고 물 흐르듯이 적재적소에 단어를 꽂아야지. 넓고 깊은 단어의 세계에 빠져보자' 하며 상기됐던 마음도 한 자 한 자 읽다 보니 어느새 바람 없는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국어학자의 역할> 부분을 읽을 땐 숙연해지기도 했다.

앞장서서 사람들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뒤쫓으며 확인하는 것이 국어학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자들이 앞장서 "이쪽으로 갑시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떨까요? 우리나라에는 외래어에 대한 배척과 선망 이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외래어에 대한 배척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어가 대량으로 유입이 되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그러한 일본어 잔재를 몰아내기 위한 운동이 거국적으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국어 순화라는 개념도 만들어지고, 고유어 사용을 위한 소위 한글 운동이라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지요.
학문적으로 어느 쪽이 옳다고 쉽게 판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고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언중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변화해 가는 것인데, 억지로 인공적인 신조어를 만들어서 그걸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자리를 잡아 굳어진다면 그것 또한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즉, 언중들의 동의를 얻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따라야 하지 주장을 앞세워 인위적으로 언어를 통제하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 p102~103 황선엽/리더스그라운드


글을 잘 쓰기 위한 도구로 선택한 이 책에는 오랜 학문 연구로 축적된 저자의 삶을 대하는 태도나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가치 판단 기준, 시대의 기류를 보는 철학이 담겨있었다. 글의 맛에 푹 빠져 책 한 권을 읽었다기 보단 대학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말미에는 좀 몰입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연스럽지 않으면 아무리 강요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라는 작가의 말은 세상의 이치인 것 같아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오뎅을 꼬치안주로, 다꾸앙을 왜짠지로 순화하려 했지만 결국 오뎅은 지금도 오뎅이나 어묵으로 불리고, 다꾸앙은 단무지가 된 것처럼...

단어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억지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 아니면 모가 아니라 걸도 있고 개도 있는...부디 세상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참나 요즘은 기승전 나라걱정이니....

따스한 봄날이 오면 무거운 마음이 좀 덜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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