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안 간지 딱 한 달째

집에서 노는 엄마는 처음이라서

by 임가영


회사 안 간지 꼭 한 달째 되는 날. 난 그냥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것뿐인데 나의 결정이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컸다. 엄마가 기자 관둔다며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했던 딸은 내가 집에 있는 걸 서서히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점차 주문 사항이 많아지는 중이다.


"엄마 집에서 노는데 왜 만날 집에 없어? 오후 2시 50분부터 4시 반까지는 학원 가기 전 비는 시간이니까 이 시간엔 꼭 집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집안일을 대충 마친 뒤 운동을 하고 모처럼 만에 선후배들과 밀린 수다를 떨다 보면 딸이 고지한 시간을 깜빡하기가 일쑤다.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부랴부랴 집에 들어서면 딸은 어김없이 입을 삐죽거린다. 내가 집에 있다고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있는 집 안 공기 자체가 딸에겐 특별한가 보다.


그리고 열세 살 사내아이가 우리 집 가정 경제에 이렇게 신경 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달 들어오던 수입이 줄었으니 돈을 아껴 써야 한다며 나의 지출에 잔소리를 늘어놓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요즘은 부쩍 내게 백수라는 말을 자주 쓴다. 처음 몇 번은 흘려듣고 넘기다가(진짜 백수 맞으니까) 버럭 짜증을 냈다. "엄마 백수 아니거든! 엄마 작가라고! 브런치 스토리 작가!!" (내가 얘기해 놓고도 민망함이 밀려오는 건 뭐지?)

사춘기가 도래한 아들은 느물 느물 웃더니 책을 출판한 것도 아닌데 작가는 무슨 작가냐며 아직 수입도 없는 작가는 진짜 작가가 아니란다. 일 그만둔 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뭐라도 해야겠다는 꿈틀거림이 격하게 일던 순간이었다.


놀 팔자는 아닌가?


아빠가 퇴원하시고 거동이 가능해지자 한 달 내내 아빠 병간호를 했던 엄마는 문화센터 보태니컬 아트 수업에 나가기 시작했다.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새 옷을 입고 화구 가방을 미리 꺼내 논 엄만 오전 10시부터 수업이 시작인데도 두 시간 전부터 나갈 채비를 이미 마치셨다. 근 한 달간 본 엄마의 얼굴 중 가장 생기가 넘쳐났다.




보름 전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와도 되냐며 조심스럽게 묻는 딸에게 흔쾌히 승낙을 한 후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코로나19가 시작될 무렵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해 남들이 그저 시간이 흐르면 통과의례 중 하나였던 기념식조차 하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지난 3년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기는커녕 변변한 생일파티조차 못해준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녈 위해 이제는 "엄마가 쏠게. 모두 불러!"를 자신 있게 외쳤는데, 막상 시간이 지날수록 다섯 아이의 점심과 간식 등을 집에서 해줄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에 초대받으면 다른 엄마들은 뭐해줘?"

"엄마 요즘은 마라탕이 대세야. 일단 밖에 나가서 마라탕을 먹고 '인생 네 컷' 스티커 사진을 찍은 뒤 문구점에 갔다가 초대받은 집에 가서 실컷 놀고 오는 거지. 별거 아냐"


고민이 절반 이상 줄어든 순간인데 집에서 쉬는 동안 단 한 번도 세차를 하지 않았던 내 차가 걸렸다.

"딸! 얼른 세차부터 해야겠다"

"엄마! 근데 마라탕 가게 갈 때 엄마 차 말고 할아버지 차 타고 가면 안 돼? 할아버지 차가 더 폼 나잖아"

열한 살 아이도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신경 쓰는 걸 보니 내 딸이 맞긴 맞나 보다.

지난 칠순 파티 때 들여놓은 화병에 새 물을 갈아주고 집안 구석구석을 치운다. "엄마 뭐 입을까?"

"엄마 웃겨. 제발 원피스 같은 거 입지 말고 엄마 평소 입는 줄무늬 셔츠에 청바지 입어. '꾸안꾸' 몰라?"

드디어 또래 여자아이 셋이 집에 왔다. 반에서 사총사인 얘네들 별명은 '공쥬즈'란다.

"공쥬즈라고 불러주세요"

자기네가 말하고도 우스운지 집 안 가득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다른 엄마들보다 더 잘해주고 싶어서 한 가지 코스를 더했다. 32도까지 훌쩍 오른 더위도 식힐 겸 달달한 망고 스무디와 요구르트 딸기 주스, 마카롱을 주문하고 난 밀크티를 시켰다. 여자아이 넷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난 밖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앉아 시원한 음료를 한 모금 삼켰다.



흐뭇한 미소로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생각하고 있는데 딸이 내 귓가에 데고 속삭인다.


"엄마 오늘 참 행복한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