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퇴사하기 좋은 날

by 임가영


누구에게나 인생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목적지가 있을 수도 있고, 그냥 눈앞에 길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이도 있다. 누군가는 그 길을 옆을 볼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길을 둘러싼 산과 풀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기도 한다. 오랫동안 길을 걷다 힘에 부치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쉬었다 가는 이도 있다.


17년이란 세월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떤 날은 새벽이나 늦은 밤까지... 이 길을 몇 번이나 오갔을까?


집과 회사를 오가던 청주 우회 도로. 지하차도를 지나 메타세쿼이아가 봄여름 가을겨울 계절마다 아름답게 줄지어 펼쳐지던 이 길. 한 번의 회전 없이 그저 직진만 하면 됐던 이 도로는 내게 수많은 상념을 정리하고 가다듬었던 '생각 도로'였다.




사직서 내기 전날 밤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마지막 회사 가는 길과 오는 그 길에 울지 않게 해달라고.


가방 안에 사직서 한 장 달랑 들고 그 길을 달린다. 사직을 결심하고 남은 연차를 모두 소진한 지난 한 달.

꼭 한 달 만에 오는 회사인데, 수 천 번도 넘게 오갔던 그 길을 지나 마주한 회사 풍경은 내게 너무나 생경하게 다가왔다.


내가 회사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 회사 주차장 뒤 그 숲도 오늘은 그저 그런 나무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 공간 그 자체였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 보름 직전까지도 출근을 했었지. 기사를 쓰다 배가 단단해지면 이 주차장을 몇 바퀴씩 돌며 뱃속 아이와 대화를 나누던 곳, 일을 하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곤 했었는데, 그 숲이 너무 예뻐 떠나올 때 슬프면 어쩌지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바라본 그 숲은 그냥 그 자리에 놓여있는 나무들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9시 출근해서 두 시간 동안 국장과 면담을 마치고, 직원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데 신기하게도 지난 한 달간 내 마음속에 가득 찼던 회사를 향한 미움과 원망 섞인 마음들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나의 스물몇 살 시절부터 매일을 함께 했던 선후배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데도 하나도 눈물이 나지 않는 거다. 상대방은 울고 있는데 난 웃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 그러고 보면 a도, c도, d도 회사를 떠나는 날 그랬던 것 같다.

난 그들을 떠나보내는 것 자체가 힘에 부쳐 눈물이 그렁그렁 한데 정작 떠나는 그들은 웃으며 안녕을 말했다.


사실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사를 쓰며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졌을 때, 회사로부터 내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 번 나의 뇌 속에 박힌 그 생각들을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오늘 퇴사를 했다.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을 불러 집 근처에서 오후 5시부터 소주를 마셨다. 찰랑이는 잔을 부딪히며 친구가 건배사를 건넨다. "해마다 힘들어 죽겠다며 퇴사를 고민하던 네가 드디어 17년 만에 그 고민을 덜어내는구나. 정말 축하한다. 고생 많았고 열심히 잘 살았다"


소주의 알싸한 목 넘김이 좋다. 술이 달다. 이자카야에서 1차로 몸을 풀고 양 꼬치 집에서 2차를 하고 있는데 b가 왔다. 진짜 가장이 된 b도 부인이 회사를 관뒀다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표정이 밝다. 이 상태가 오래가야 할 텐데...


기분 좋은 수다와 알코올로 정신이 흐릿해진 우린 술은 해장국으로 마무리를 해야 된다며 3차로 감자탕 집을 또 갔다. 내가 술을 먹는 건지 술이 날 먹는 건지 술술 잘도 들어간다. 공깃밥까지 깔끔하게 한 공기를 싹 비우고 든든해진 난 집에 와서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새벽 3시 빗소리에 잠이 깼다. 침대에서 눈을 껌뻑껌뻑이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니까, 지난 하루를 잊기 전에 글로 써야겠단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렇게 지금, 서서히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나의 지난 17년은 정말 다이내믹했다. 내가 쓴 기사에 앙심을 품고 몰려온 장정들에 경찰 기동대가 출동을 하질 않나 회사 주차장 입구를 막아선 그 때문에 경찰이 며칠을 회사로 오기도 했었지. 검찰에도 불려 가고... 그러고 보면 좁은 동네서 참 예민하고 날 선 기사들을 많이 쏟아낸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온다.


치열했던 월 화 수 목을 지나 매주 금요일 한 주의 마무리를 했던 '문화 다이어리'. 문화 현장은 나의 기자 생활을 연명하게 했던 효과 좋은 치료제였다. 그림을 보며 한 주간 다쳤던 마음을 치유하고, 인고의 시간을 거쳐 작품을 만들어낸 그들의 열정에 내 삶을 다독여갔다. 문화 현장에서 들었던 가야금, 첼로, 피아노 소리는 실제 공연장에서 들었던 그 어떤 연주보다 마음을 울린 감동의 시간들이었다. 지역의 작가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그간 회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본다.


'그래 맞아. 나빴던 기억보단 좋았던 날들이 더 많았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네'


투두둑 비가 내린다. 퇴사하기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