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냐짱에서 여행한 지 5일 차 아니 6일 차 되는 새벽이다. 숙소가 바뀌어서인지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밤이다. 그간 있었던 숙소는 아이들이 마음껏 수영하고 놀 수 있는 액티비티 리조트였다면 오늘 새롭게 하룻밤 묶을 숙소는 신혼부부나 온전히 휴양을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M리조트의 첫인상은 군더더기 없이 자연 그대로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그대로 품은 '광활한 바다' 그 자체였다.
고요하고 잔잔한 물 위에 타원형의
도자 조형물이 떠 있는 모습은 하늘과 바다 아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형상인 듯하다.
활기차고 복작거리는 전 숙소와 달리 풍경 자체가 주는 매력에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던 순간이다.
b 역시 나와 비슷한 느낌인지 아무 말 없이 흐뭇하게 바다를 바라본다. 리조트의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웰컴 티도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방금 갈아준 것처럼 상큼하니 맛있다.
꼭 이 왕국의 공주라도 된 것처럼 내가 들떠 있는데 반해 아이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덥다고 투정이다.
문을 연 순간 빵빵하게 돌아가는 에어컨으로 무장한 전 숙소와 달리 이곳은 오픈된 구조라 자연 채광과 바닷바람을 오롯이 맞아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 방울이 맺히는 이 기분이 좋다.
'아 이게 여름이지!'
눈앞에 펼쳐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에 모조리 정신이 팔려 32도를 웃도는 더위 따윈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더 짜증내기 전에 체크인 전 리조트 내 식당을 찾았다.
"거긴 시원할 거야. 버기 타고 가서 밥 먹고 숙소 들어가면 되지. 좀만 참아."
근데 웬걸 시원할 줄 알았던 레스토랑도 창문을 모두 젖힌 채 쨍한 여름을 그대로 맞이하고 있었다.
커다란 선풍기 몇 대가 돌아갈 뿐, 식탁 위로는 총총 참새까지 놀러 와 앉았다 가는 진귀한 모습까지 보여주고 간다.
나와 b는 웃음이 나고 애들은 더워 죽겠다며 아직 골을 부리고 있는중이다.
그 모습마저 어찌나 귀여운지 여행지에선 한 없이 너그러운 엄마가 되어간다. 가끔 아닐 때도 있지만...^^
"엄마 도대체 왜 여기가 전에 있던데 보다 더 좋은 데야? 진짜 이해가 안 가는데.. 수영장도 어른용이고 아이들이놀거리가 없어."
"엄마 퇴사 기념 여행이니까 하루쯤은 엄마 취향도 좀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어?"
나의 삐진 말투를 알아챘는지 그제야
"어 방이 거기보다 좋긴 좋네."
"여보 냐짱 시내 나가서 저녁에 안주 삼을 거라도 사 와야 하지 않겠어?"
내심 맘 같아선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었지만 5일 연장 베트남 음식을 먹은 b는 한국 음식이 퍽이나 그리웠나 보다.
선크림을 바르라고 바르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쏟아부어도 꿈쩍도 않더니만, 심지어 내가 좀 덧발라주려 하면 손사래를 치더니만, 수영할 때 민소매를 입었던 어깨부터 팔이 화상을 입은 것 같다.
진짜 미치도록 따갑고 열이 올랐을 테지만 b는 부인 말 안 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여자 말 안 들어서 손해 볼 것 없어. 알았지? 앞으론 내 말 잘 들어!" 흘깃 눈초리를 올려 쳐다보다가도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니 딱해 죽겠다.
냐짱 시내 나가자는 말에 "엄마 우린 숙소서 좀 쉴래. 둘이 다녀와"
타국에서도 둘이 있을 수 있겠다고 하는 걸 보고 아이들이 새삼 많이 자람을 느낀다.
시내까지 가는 호텔 셔틀을 타고 둘이 나란히 앉았다.
b는 떨어진 한국 라면과 냉동식품을 꼭 사야겠다는데 그러려면 셔틀이 내려준 곳에서 좀 떨어진 롯데마트까지 걸어가야 한다.
초반 500m 정도는 잘 걷다가 푹푹 찌는 더위에 짜증이 슬슬 밀려온다.
"그냥 아무 마트 가서 대충 사고 가면 안 돼?" 나의 투정에
"이 것도 다 추억이야. 난 자기랑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려고 했지."
"커피는 무슨 애들 기다리잖아! 알았어. 암튼 빨리 가자"
한참 구글 맵을 보고 걷는데 b가 말한다.
"핸드폰 이리 좀 줘봐. 뭔가 이상한데?"
길치인 난 그냥 느낌대로 걸었을 뿐인데
"꼭 길치인 거 이렇게 티를 내요. 반대로 걷고 있잖아."
난 꿍시렁꿍시렁 거리며 "나 도저히 못 걷겠어. 아이스커피 마시면서 걷자." 하며 눈에 보이는 아무 커피숍이나 들어갔다.
지쳤다. "추억은 개뿔!' 하며 입을 삐죽거리다 아이스커피 한 모금을 빤다.
어머 너무 맛있다. 금세 기분이 풀린 난 "우리 셀카 찍을래?"
커피를 마시며 조금 걷다 보니 롯데마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랄까?
조금 고생스럽긴 했어도 b말대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숙소에 들어와 마트서 사 온 간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Time is gold"란 명언이 절절하게 와닿자 마음이 급해졌다.
"밤 수영 하러 가자!"
날 뺀 나머지 셋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버기를 불러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장의 밤 풍경에 난 또 매료되고 말았다.
까만 밤에 유난히 빛나는 별이 두 개 떠있다.
"저거 비행기야?"
"비행기라고 하기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잖아."
"별이라고 하기엔 너무 반짝 반짝이잖아"
"그럼 UFO인가?"
아이들의 대화에 또 웃음이 나온다.
"반짝이니까 별이지. 너네 그 동요 몰라?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 아래서 동쪽 하늘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