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물리치료, 오후에는 나이스샷!
친구 엄마와 스크린골프 약속이 있는 날이다. 얼마 전 g의 엄마가 칠순이셨다는 말이 떠올라 꽃집으로 향한다. 얼굴 뵌 지 10여 년도 넘은 것 같은데도 맛깔스러운 음식을 한 상 내주셨던 아줌마의 웃는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화원의 싱그러운 꽃들 가운데 메인 꽃은 주황색 카네이션으로 골랐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담는 의미에서 오늘의 꽃은 카네이션이 딱이었다. 친구 엄마는 내 엄마이기도 하니까.
골프백을 뒤에 싣고 보조석에는 꽃 한다 발을 태웠다. 스크린골프장까지 가는 그 길이 소풍길 같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빨강 바지를 입고 드라이브 스윙을 하는 오 여사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어머니 누가 칠순이라고 하면 믿겠어요? 진짜 끝내주세요!"
작은 체구에도 비거리가 상당하다. 타석 앞에 선 나. 몇 년 만에 보는 친구 엄마 오 여사 앞에서 스윙을 하려니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다. 첫 번째 홀, 왠지 긴장이 돼 힘을 잔뜩 주고 드라이브 샷을 날렸는데 공이 발 밑으로 맥없이 툭 떨어진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연습 스윙 때는 슝슝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었는데 3홀까지 드라이브가 폭망이니 진땀이 바작바작 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정식 레슨을 받지 않고 가족들에게 아름아름 배운 g와 삑사리를 함께 내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뽕샷이면 어때! 뒤땅이면 어때! 셋이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저 즐거울 뿐이다. 슬슬 긴장이 풀어지니
6홀부터는 볼이 좀 맞기 시작했다.
"가영아 넌 하체가 좋아서 조금만 더 하면 나중에 시니어 선수해도 되겠어"
"앗 시니어 선수요?"
"지금부터 시작하면 시니어급은 아마 선수로 뛸 수도 있지"
한 번도 생각 못해 본 건데 갑작지 욕심이 생긴다.
직장 다닐 때는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짧은 스커트를 입고 골프채를 휘두른다. 스윙 영상이 다시 나오는데 하하하 오 여사 말대로 하체가 참 튼실하긴 하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골다공증 생길 염려는 없겠다며 혼자 피식 웃는다.
"엄마 어깨만 안 아팠어도 오늘 더 날아다니는 건데."
"어머님 어깨 아프셔?"
"응 가영아 오전에 정형외과 가서 물리치료받고 온 거야."
"괜찮으세요?"
"신경 좀 쓰면서 치면 괜찮아" 멋모르고 질러대는 40대 딸들과 달리 칠순의 오 여사 진짜 실력은 그린에서 나온다. 역시 골프는 구력이다.
"수련아티스트님 차례입니다." 평소 민화를 즐겨 그리시는 오 여사의 골프 닉네임은 수련아티스트. 호가 수련이라고 하신다. 훗날 나의 아들 딸 친구들과 초록의 잔디를 밟는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본다.
스코어는 엉망진창이었지만 모처럼 세대를 뛰어넘은 세 여자의 수다까지 더해진 스크린라운딩은 엔도르핀을 돌게 했다.
스크린 라운딩 후 삼겹살에 소주 한잔, 잔을 기울이며 세 여자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엄마 소주 한 잔 더 괜찮겠어?" g의 말에 오 여사의 대답이 명언이다.
"오전에 물리치료하고 오후에 라운딩 하는 게 인생이야. 아프면 병원 가고 또 괜찮으면 운동하고,
술 마시고 속 아프면 좀 쉬고. 팍팍하게 살지 말자. 인생 한 번 뿐이잖니"
이런 게 세월에서 묻어난 지혜로운 삶의 자세 아닐까?
칠순의 나이에 자식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여유 시간에는 민화를 그리는 오 여사를 보고 누군가는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고1 때 g와 같은 반이 되어 지금까지 친한 친구로 그녀의 삶을 엿본 나로서는 오늘 같은 하루가 펼쳐지기까지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아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기에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모른다.
g가 특별한 나의 친구라서, g의 엄마가 내 친구 엄마라서.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내 손에 g가 쇼핑백을 건네준다.
"엄마 칠순 때 했던 답례품이야. 엄마가 직접 그린 민화를 발매트로 만든 건데. 집에 가서 써."
발매트를 펴보니 <2023.07 고희 기념 오 00 드림>이라고 적혀 있다.
"g야! 너희 엄마가 그린 그림을 어떻게 발매트로 써. 집에 고이 모셔둬야겠다. 더군다나 엄마 성함도 적혀 있잖아"
"뭐 어때? 곁에 두고 가끔 울 엄마 생각하며 자주 쓰는 게 훨씬 좋은 거야. "
오늘 아침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릴 말리며 발아래를 보니 익살스러운 호랑이와 강아지가 마주하고 있고 그 모습을 놀란 까치가 소나무 위에서 보고 있다. 목욕탕에서 나와 발매트를 밟을 때마다 활짝 웃던 오 여사와 g의 골프 뒤땅 치는 모습이 생각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