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영화학과에 다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테크노에 미쳐 나이트 죽순이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내 기억으론 반년 정도 일주일에 서너 번가량은 춤을 추러 갔으니까.
난 그때 춤에 미쳤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조명 아래 대형 스피커에서 빵빵 터지는 테크노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고개를, 어깨를, 몸통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아마도 그때 목디스크가 발병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짐작해 볼 따름.
7cm 굽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몇 시간씩 춤만 추는데도 그땐 전혀 힘든 줄 몰랐다. 오히려 하이힐에 무게 중심을 둔 채 몸의 균형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솟구쳤으니까.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아직도 테크노의 기계적인 반복음이 주는 쾌감과 춤을 추는 순간 무아지경에 빠졌던 그때의 그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밀레니얼 세대, X세대로 불리던 당시 우리 또래들이 나이트클럽에 가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했다.
난 집과 가까웠던 청주 성안길 입구에 있던 X존텍이라는 곳을 주로 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술도 안 마시고 몇 시간씩 무슨 재미로 오지게 춤만 추다 왔는지 웃음이 절로 난다. 입장료만 내고 들어가면 팔찌를 채워주고 음료를 줬던 콜라텍이었다.
남자들은 춤을 추러 온다기보단 여자를 꼬시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여자들 역시 그곳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그럴싸한 이성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난 양심에 손을 얹고 정말 춤이 좋아서, 미친 듯이 춤만 추다가 왔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은 미국에 사는 눈이 큰 G와 177cm 큰 키에 모델 몸매 소유자인 U, 삼인방인 우린 무대에 올라 일렬로 줄을맞춰 춤을 추곤 했다. 솔직히 춤을 추는 그 시간이 좋았고, 날 보는 무대 아래 그 시선이 좋았다. 그렇게 나의 나이트 죽순이 생활도 주야장천 반년 정도 이어지다 보니 점점 시들해져만 갔다.
그런데 가끔 주말에 집에서 낮에 와인을 마시는 날, 취기가 알딸딸하게 올라올 그즈음엔 그때 그 시절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딸 J와 함께 춤을 춘다. 한 번은 치즈 몇 조각에 말벡 와인을 마시고 흥이 올라 딸에게 이정현의 '와'를 틀어달라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널 놓치기 싫었어..." 노래까지 곁들여새끼손가락을쫙 펴서 입가에 대고
강렬한 테크노 여전사처럼 과격한 춤을 이어갔다.
딸은 나의 현란한 춤사위에 살짝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엄마 조금 미친 사람 같아"
"이 춤은 원래 이렇게 추는 거야. 봐봐~"
"엄마 춤은 아이브, 뉴진스지~날 봐" 하며 나와는 전혀 다른 정교하고 현란한 몸동작으로 춤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오~!!!"
'왕년에 날 닮은 거니?' 내 딸 아니랄까 봐 진짜 끝내주게 잘 춘다. 아이돌을 시켜야 하나?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울 남매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가끔 대낮에 나에게 낮 술을 권한다.
"엄마 이번 주엔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엄마 집에서 와인 마시고 함께 춤추자. 엄마 취해서 흥 오르면 춤추는 거 재밌어"
부모님 정기 검진 일에 운전도 해드릴 겸
서울에 간다고 하니 울 딸 옆에 와 몸을 배배 꼰다.
"엄마 강남역 라인 프렌즈스토어에서 뉴진스
팝업 스토어 하는데 너무 가보고 싶어"
내가 쉴 때나 해줄 수 있는 일 같아서그렇게 난 오늘 뉴진스 덕후가 됐다.오전 11시에 대기 입장표 끊었는데 웨이팅 100명. 이것도 양호한 편이란다.
강남역 근처 커피숍서 1시간 40분 기다리다 드디어 입장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어 엄마. 나 몸에 이상 있는 건 아니지?" 맥을 짚어달라고 한다.
"좀 빨리 뛰긴 하는데 엄마가 보기엔 정상이야"
오랜 기다림 끝이지만 정작 팝업스토어엔 sold out 딱지가 너무나 많이 붙어있었다.
기대와 달리 약간 실망한듯한 딸.
"우리 뉴진스 언니들이니까 괜찮아. 못 산건 인터넷으로 사면 돼!"
'그럼 여긴 왜 왔니?'
딸의 반짝이는 눈에서 이십 년 전 날 봤다.
고등학교에 '1318 힘을 내!' 프로그램 녹화차 젝스키스가 왔었다. 은지원이 좋다며 목이 터져라 "오빠 사랑해요!!!"를 외쳤던 나의 눈과 표정에서딸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