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내게 주어진 하루를 예나 지금이나 쪼개 쓰는 건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후 내게 찾아온 변화는 실로 너무나 컸다. 17년 다니던 직장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자유인으로 지냈던 다섯 달을 빼곤 어릴 적부터 줄곧 바지런을 떨며 지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새 옷을 입게 된 이후의 나의 하루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 주변에도 분단위로 시간을 계산해 하루를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적잖이 놀래기도 했으니까.
지난 두 달이 꼭 몇 년은 된 것처럼 그 사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곳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삶의 가치관이나 생활태도, 일을 대하는 자세 등 내 삶의 변화가 찾아온 건 분명했다. 나의 변화는 가족에게도 또 다른 삶의 패턴을 만들었다. 쳇바퀴 회로처럼 돌아가는 나의 하루를 마주한 나의 b도, 두 남매도... 처음 한 달좀 버거워하는 눈치였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지자면 b의 경우 당장 남편 파업에 들어갈 태세였다. 다만 나의 부모님만큼은 그 셋과 달리 든든한 조력자가 돼주셨다. 종종거리며 변화된 하루를 맞이하는 딸이 그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하셨으니까.
이런 까닭에 b와는 부부생활 10여 년 만에 큰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신기할 만큼 우린 더욱 견고해졌다. 첫사랑에 빠져 17년 연애를 하고 13년의 결혼생활을 해온 30년의 구력, 연인(?) 같은 부부간의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위기를 넘긴 게 아닐까?
고맙다. 너에게.
업무가 아닌 내 얘기를 끄적이고 싶어 노트북을 여는데 두 달이 걸렸다.
내가 새로운 일에 차차 적응해 나가는 사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나의 맘은 진짜 작가가 됐다.
내가 그토록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그 이름 두 글자 '작가'
'여든에도 색연필을 가지고 놀고 싶다'란 작품으로 푸른솔문학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엄마의 오랜 꿈이 이루어졌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딸은 업무로 바빠 시상식을 직관하지 못했고,
행사 시작 전 잠시 얼굴만 비추고 왔다. 그렇지만 엄만 알 거다. 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딸인 내가 박정자 작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12월이 되자 챙겨야 할 행사와 모임은 더욱 많아졌다. 그렇게 월화수목금토일월월월화화화 이렇게 이어지던 수많은 날들 중 오늘 수요일 6시 정각에는 운이 좋게도 회사를 나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벅차고 소중한 퇴근 이후 그 몇 시간.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빠가 사 온 인삼 딸기가 식탁 위에 놓여있다. 빛깔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상큼한 딸기를 한입 베어 물자 과즙이 팡 터져 나온다. 입 안에 딸기 향을 가득 머금고 아들 학원 픽업에 나선다.
그리고 또 남은 시간엔 5학년 부회장 선거 출마 준비하느라 너무 고생했다며 서점에서 아이돌 앨범을 사달라는 딸을 데리고 영풍문고를 갔다. 인터넷이 아닌 특유의 새 책 냄새가 나는 진짜 서점에서 책을 7권이나 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부터 제목이 특이해서 고른 '전쟁 같은 맛', 여기자 후배인 hj와 같은 책을 읽고 싶어 고른 '세이노의 가르침', 그리고 '보통의 언어' 때부터 팬이 된 이석원의 '어떤 섬세함' 등...... 그중 따뜻한 방에 들어와 가장 먼저 손이 간 책은 이석원의 '어떤 섬세함'이었다.
익숙한 이름이 주는 편안함.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이석원 작가가 불안을 마주하는 모습과
그가 느끼는 소소한 일상에서 찾는 불안 너머의 작은 행복.
특별한 기교도 장대한 서술도 없는 그냥 보통의 언어들로 이어진 그의 삶 속에서 난 희망과 위로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