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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May 12. 2024

<언제나 책봄> '동급생'

마지막 단 한 줄, 반전의 결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언제 식사 한 번 해요" 혹은 "조만간 술 한 잔 해요"란 말을 듣는 게 다반사다. 처음에는 곧이곧대로 듣고 '언제 먹자는 거지?' 핸드폰을 켜서 한가한 날을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이젠 그냥 인사치레인가 보다 여긴 지 오래다. 언젠가 술밥 먹자는 인사를 나눈 후 그 사람과 다시 대면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내가 먼저 먹잔 소릴 하지 않았는데도 괜히 대면대면해지는 이유는 뭘까?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는데 말이다. 반면 굳이 만나고 싶지 않는데도 즉석에서 핸드폰을 켜라며 스케줄러 속 빈 날짜를 골라 약속을 성사시키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산다는 건 참 묘하다.

제 야인이 된 전 시장님을 얼마 전 갤러리에서 우연히 보게 됐다. 기자 시절, 그것도 몇 년 전인지 가물가물한데 그 당시 했던 '밥 한 먹자'는 약속이 성사됐다. 분주한 하룰 마감하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퇴근길, 친한 여후배와 함께 전 시장님을 만났다.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보는 건 참 오랜만인데 얼굴이 편안해 보이셔서 좋다. 자리에 앉자마자 예상치 못한 책 한 권을 주신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정해진 이번 주 브런치 책 한 권은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다.

책 장을 넘기자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는 임가영 님께'라고 적혀 있다. 책도 책이지만 적어주신 글이 분에 넘쳐 기분이 몹시 좋아진다.(ㅋ속물) 얼음 섞인 소주에 레몬즙을 서너 방을 떨어뜨려 마신다. 가벼운 목 넘김처럼 우리의 대화도 책을 안주삼아 깊어만 간다. 책 내용을 미리 스포 하진 않으셨지만 마지막 결말의 반전이 기가 막힌 책이라며 기대감을 안겨주신다. 이날 대화 대부분은 책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졌고, 취기가 좀 올랐을 땐 평소 좋아하는 작가님께 전화도 걸었다. 나와 30년가량 나이 차이가 나는데도 공통의 관심사인 책 앞에선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삶과 우정을 다룬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1930년대 초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시작했던 무렵 독일을 배경으로 유대인 소년인 '한스'와 독일 귀족 집안 출신 '콘라딘', 두 소년이 그려나가는 우정이 축을 이룬다. 책의 배경이 독일이라는 점과 '한스'라는 주인공 이름이 같아서일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속 한스와 그의 친구였던 반항기 어린 헤르만 하일러가 자꾸만 떠올랐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헤세의 한스처럼 '동급생'에 나오는 한스도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귀했던 그들의 우정.

잘 생기고 매력적인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이자 랍비의 손자인 화자 한스 슈브르츠와 친구가 된다. 마치 연애 때 상대방을 슬쩍 간 보는 것처럼 서로를 관찰하던 그들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됐을 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선 그들 사이 불길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콘라딘이 우리 집에 들어섰던 날 이후로 나는 그가 자기 집에도 들어와 보라고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며칠, 몇 주가 지나도 그는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호엔펠스 가의 방패문장을 든 두 개의 독수리상이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격자 창살 대문 밖에서 멈추어 섰고, 그는 작별 인사를 하면서 묵직한 대문을 열어 양옆으로 향기로운 협죽도가 늘어선, 중앙 현관과 정문으로 이르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가 거대한 검은 문을 가볍게 두드리면 문이 조용히 뒤로 미끄러지듯 열렸고 콘라딘은, 마치 영원히 사라지기라도 하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검은 문 뒤로 미끄러지듯, 사라지기라도 하듯 들어가는 콘라딘.

이 문장 속에 그들의 운명이 복선처럼 어둡게 드리운다. 두 소년이 아무리 하늘의 아름다운 별을 이야기하고, 랭보와 릴케의 시를 읽으며 서로를 교감한다 할지라도... 헤어질 인연은 결국 헤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은 이미 조물주에 의해 정해진 것일지도 모르는 것처럼... 유대인 소년과 독일 귀족 집안 출신 소년의 우정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슬펐다. 그리고 잠시 내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친구가 있었나? 친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한스처럼 콘라딘과 같은 친구가 내겐 있기나 했나? 비교적 유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집에 빨간딱지가 붙게 된 이후 난 함께 어울렸던 여자 친구들을 멀리했었다. 아마도 남부러울게 없이 살다 월세집으로 옮기게 된 내 처지를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아니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내겐 고1 잼버리대회에서 만난 지금의 신랑 b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 그래서 단짝 친구보단 여러 무리가 함께 어울려 지내다 보니 한스와 콘라딘 같은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사춘기에 접어든 12살 딸아이는 세상의 중심이 친구와 우정 쌓기로 돌아가는 듯하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아침잠이 많은 아이인데도 그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 7시 50분이면 집을 나선다. 딸이 좋아하는 걸그룹 뉴진스 얘기와 내가 듣기엔 시시껄렁한 수다를 먼발치서 가만히 듣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리 딸이 한스와 콘라딘처럼 지구의 종말이라든과 책과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다가 또 피식 웃는다.

이처럼 책은 날 잘 웃게도 하고 눈물짓게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의문점들을 거의 매일같이 논의했다. 슈투트가르트의 거리들을 엄숙하게 오르내리거나 때로는 밤하늘에 떠 있는 베텔게우스*와 알데바란*을 올려다기도 하면서. 그러면 그  별들은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조롱하듯 차갑게 깜빡이는 뱀의 눈처럼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나치들의 잔혹한 악행들이 본격화되기 전 유대인이었던 한스의 부모들은 그를 미국으로 도피 유학을 보낸다. 한 때는 삶의 전부라고 여겼던 친구와의 둘도 없는 우정은 극단적인 역사적 배경으로 이별을 맞는다.

이 책의 백미인 마지막 한 줄이 압권이지만 여기에 적진 않겠다.

영화 식스센스 이후 최고의 반전이었다.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 전 번역가의 약력을 보니 충북 청주가 고향이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책의 감동과 함께 배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인류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다루면서도 작가는 사건들을 을과도하게 감정적이거나 멜로드라마틱하지 않게, 약간의 역설을 가미해 가면서 이야기한다. 청소년기의 가슴 저리게 외로운 심정을 극단적인 역사적 불행이라는 배경에 대조시켜 또렷이 포착하는 한편, 성장 배경이 다른 두 10대 소년 사이의 독특한 우정과 영원히 지속되는 참된 우정의 힘을 태피스트리처럼 엮어 짜는 동시에 인간 간정신의 도덕적인 면면을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 내면에 잠복해 있는 사악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옮긴이 황보석 : 1953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내겐 여고생 때부터 30년가량 무리 지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인생을 백 살까지 산다고 치면 반을 살아온 시점에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한 명 한 명 친구가 가진 고유의 진가를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빠져들고 있는 요즘.

항상 그 자리에서 날 받아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고요한 새벽이다. 







*오리온 자리의 알파별이자 오리온 자리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

*황소자리의 알파 별이자 황소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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