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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가영 Aug 18. 2024

찐득하게 깊고 아픈 맛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을 읽고

문 밖 너머로 손주를 향해 빨리 태극기를 달라고 채근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울린다. 어젯밤 폭염을 뚫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서인지 몸이 천근만근이다. 침대와 한 몸이 된 나를 일으킨 건 태극기가 어딨 냐는 아들의 목소리. 그 마음이 기특해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맑은 하늘에 태극기가 힘차게 나부낀다. 광복절 아침이다. 순간 몸속에 *국뽕이 서서히 차오른다. 이 기세를 힘입어 오늘은 꼭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여름 서점에 가 스무 권 정도의 책을 한 번에 사 온 적이 있는데(직장을 그만두고 백수의 참맛을 보던 그 시절), 그중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아 일 년째 책장 속에 외로이 꽂혀 있던 책이다.

저자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

오랫동안 이 책에 손이 가지 않았던 건 한국전쟁, 기지촌, 조현병, 폭력과 트라우마,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작, <타임> NPR2021년 '올해의 책' 등 책 표지에 적힌 책에 대한 소개 글이 주는 무게감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우리나라의 역사였기에, 기사로만, 영화로만 접했던 한인 디아스포라의 일원이 쓴 회고록이었기에 가볍게 읽고 싶진 않았다.


상선 선원이던 백인 미국인 아버지와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저자.

자국에서 '양공주'라고 불리며 멸시받던 조의 엄마는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왔지만 영혼까지 산산이 조각나 조현병에 걸린다.


<1976년 미국 워싱턴주 셔헤일리스>란 제목의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글.


작가는 사는 동안 세 명의 엄마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첫 번째 유년기의 엄마는 아버지 고향인 미국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엄마다. 고향인 한국에서처럼 자연에서 나는 먹거리를 채집해 음식을 만들고, 이국적인 한국 음식으로 이웃에게 파티를 여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하지만 이 시골 마을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가 저변에 깔려있었다.


조의 두 번째 엄마는 '과대망상'과 '편집증'으로 점점 미쳐가는 여자였다.


나는 엄마가 두렵기도 했지만,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두려웠다. 엄마는 목소리의 포로가 되어, 이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라는 그것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낯선 사람이랑 얘기하지 마. 전화받지 마. 밖에 나가지 마. 요리 그만해. 그만 먹어. 그만 움직여. 그만 살아.////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 나는 엄마를 잃었다. 엄마는 사회에서 물러났고, 사회는 엄마를 내버릴 수 있는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 사망선고를 내렸다. 그것은 엄마로 하여금 인격을 상실케 하고, 모성까지 잃게 한 고정관념이었다. 정신병자가 사랑할 수 있거나 사랑받을 수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레이스 M. 조, [전쟁 같은 맛] 2023, 19


세 번째 엄마는 저자가 박사 과정을 준비하며 조현병에 걸린 엄마와 함께 30대를 보낸 시기이다. 아무 곳에도 나가지 않고 방안에만 웅크려 사는 엄마에게 한국 음식을 요리해 주며 그녀의 과거를 학문적으로 연구했던 그 시기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은 미국 서부의 셔헤일리스로, 미군들이 향락을 즐기는 어느 펍으로, 조의 엄마는 죽었지만 여전히 냉장고에는 남아있는 김치가 있는 뉴욕으로,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어 깊은 숲으로 들어가 버섯과 야생 블랙베리 따는 일에 집착했던 그 숲으로 이리저리 옮겨간다.

463페이지의 긴 글을 읽는 동안 찐득한 슬픔과 외국인 혐오에 대한 분노가 스며와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숙연해졌다.


그러다 내 옆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딸! 만약에 엄마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음 그러니까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술 집 같은 데서 일한 사실을 네가 알게 됐다면 어떨 거 같아?"

"음.... 정말 싫을 것 같아."

딸의 표정은 정말 난감하고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근데 왜?"

한국전쟁과 미군, 위안부 문제 등을 설명해 주긴 했는데 딸 표정이 심각해져 좀 더 크면 자세히 얘기해 주기로 한다. 몇 마디의 말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깊숙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라서.


작가는 엄마의 사망 후 엄마에게 찾아온 환청의 목소리, 조현병의 근원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다. 삶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지 모르는 우울하고 나쁜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과정들이 얼마나 잔혹했을까?

어쩌면 독한 트라우마였을지 모를 지난날의 기억들을 글로 옮겨 세상 속에 펼쳐내는 일.

작가는 해냈다.


묵직한 감동과 가슴을 저미는 '전쟁 같은 맛'

엄마와 딸 사이라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던 숨기고 싶었던 지난 과거의 이야기.


이 책을 읽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며 현시대의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했고,

2년째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속히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국뽕국가히로뽕(philopon)의 합성어다. 흔히 유튜브나 타 인터넷 사이트에서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 돋보인 일을 했을 때 국뽕 한 그릇을 달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 고유의 토착 밈으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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