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카고

사촌동생을 만나다.

by Rumi

6시간 늦어진 비행기를 타는 건 문제없다. 뭐 고구마포장을 할 것도, 하똘이를 산책시킬 일도 없는 그냥 시간을 즐기면 된다. 배낭은 찾았으니, 보스턴 공항을 어슬렁 돌아다녀도, 아끼며 읽는 책을 마저 읽어도 혹은 공항 난민이 되어 잠을 자도 좋은 시간과 장소이다. 내가 선택한 건, 오늘의 일기를 쓰며, 간간히 책을 읽는 거였다. 불나는 발바닥을 식힐 겸, 카페에 가니 막내딸 정도의 아가씨가 반갑게 따뜻하게 주문을 받는다. 보안관의 도시 보스턴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래도 명치를 누르는 건, 40여 년 만에 불쑥 찾아온, 이모핑계로 어디 놀러 갈 궁리가 더 큰 듯한 사촌언니라는 작자를 미시시피강 유역의 메이플우드에서 시카고 오헤어 공항까지 마중 나오는 든든한 사촌동생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목이 조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명치가 조여 온다. 릴랙스, 릴랙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또다시 보스턴 공항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녀, BTS의 명성에 먹칠을 할 수는 없다.


아, 이런 날 내가 읽을 책은 한 *의 책밖에 없다. 약 2년 만에 읽는 소설 그것도 한 *의 책. 군더더기 없고 힘 있는 문장의 맛으로 좋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한 *을 좋아하는 독자로 말하자면 이번 책은 군더더기가 많다.


4.3 항쟁과 광주 민주화운동을 마치 세뇌교육을 하듯이 되새긴다. 온 제주를 뒤덮는 눈바람을 헤치며 목숨을 걸고 빈집에 가는 여자는 손가락이 잘려, 응급수술을 받고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로 접합부위를 찔러 피를 내야 하는 여자와 누가 귀신인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게 머리를 맞대고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오빠, 여동생, 동네사람들 그리고 베트남전쟁학살피해자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간 치매 걸린 할머니의 인터뷰로 까지 이어진다. 아 지겹다. 그만 좀 하지. 일류 작가에게 대거리라도 하고 싶다. 아 놔.... 그만 좀 하지.... 결국 내가 한 선택이었다. 그 책장에는 물론 한 *의 책이 많았고 전시가 잘 되어있기는 했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한 책이다. 빌린 책이지만, 주인장을 꼬셔 LA친구에게 주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한 듯하다. 이제 생각하니.....


그렇게 여타의 공항증상과 책의 어둠이 뒤섞인 채,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이 부분도 한 마디 해야겠다. 보스턴공항에 오니, 중간이 없다. 난 중간이 그립다. 우리나라는 너무 심하게 되뇌며 떠들고, 보스턴은 너무 간결하게 군다. 출발예정이 8시 30분. 적어도 내 생각으로 8시부터는 탑승을 해야 할 텐데(작은 비행기로 인원이 많지 않지만) 8시 15분이 돼도, 안내데스크에 잠깐씩 어슬렁 거리는 사람만 있을 뿐 안내 멘트도 없지만,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래 이게 보스턴의 규율이라면 인정. 하지만 내 안의 불안은 나를 옥죄인다. 동생이 너무 피곤할 텐데. 내가 민폐등극이야. 그냥 시카고 오헤어공항 근방에서 호텔을 잡을걸..... 하지만, 8시 15분이 지나 17분에 탑승을 시작하곤 8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라니, 무슨 고속버스도 아니고..... 그래서 탑승은 늦었지만, 시카고 입성은 제시간에 닿았다.


루미씨는 시카고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우선, 보스턴 입국절차의 비극을 되돌리지 않으려면, Where is a transfer line? I missed my airport and I losted my bag. 그리고 1분이라도 시간을 줄이는 것 등등.


바람대로 창가에 앉았다. 한국은 지금 오전인데, 하똘이랑 산책 가면 찬란한 시간인데.... 그렇게 비행기 창문너머를 보고 싶어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내 안의 불안과 책의 어둠이 뒤범벅된다, 아 답답하다. 오늘따라 창밖의 하늘은 온통 어둠뿐이다. 규칙적으로 반짝이는 날개의 빨간 불빛과 초승달이 전부다. 시계를 봤더니 아직도 구름 위 저만치인데, 10시 30분이 되어간다. 앗 이러면 동생한테 10시 조금 넘어 나간다는 내 말은 또 실언이 된다. 결국 11시에 도착하겠고, 수속과 가방을 찾으면 11시 반. 두근두근. 아, 저 어둠이 너무 답답하다. 어서 시카고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고 호흡을 하는 것뿐이다. 가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이 두렵다면 잘 이해를 못 했는데, 오늘 나는 이 어둠이 답답하고 두렵다. 내 안의 두려움과 짝짜궁 하며 어둠을 키워가는 것 같다.


드디어 시키고의 불빛이 보이며 천천히 하강할 즈음 비행기모드를 풀었다. 아니 이제 10시잖아? 혹시 비행기 모드일 때시간이 변하나? 다시 조작을 해도 시간은 이제 10시다. 결국 제시간에 도착하는 착한 비행기다. 난 도대체 뭘 본거지? 내 불안과 실제 어둠이 짝짜궁 하던 바로 그때 내가 본 핸드폰의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이제 시카고에 들어가는 심사와 가방을 찾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일이 남았다. 서둘러 나가며 되뇐다. Where ----? I missed ----, 하지만 시카고는 지선만 오는 공항인지 입국심사라는 게 없다. 그럼 가방은? 수화물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칠칠치 못한 주인들을 찾는 가방을 지키는 아르바이트생 옆에 나를 뿌듯하게 해 줄 가방이 있다. 익스 큐즈미. 디스 이즈 마이 백. 땡큐 소 머취.



사촌동생을 만나서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인천에서 짐을 수하물로 부치면서 키오스크 도움을 주던 분께, 루미씨는 보스턴에서 짐을 받고 정리할 것이란 말을 했었다. 환승을 해도 수화물은 마지막 코스까지 전달되는 게 원칙인지, 혹은 네일아트를 심하게 해서 손톱은 거의 못 쓰고 검지의 지문부위를 중심으로 키오스크를 다루던 분의 실수였는지는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수화물표에 시카고라고 쓰여있는 것도 못 보고 흔들어대던 칠칠하지 못함과, 다른 건 다 영어표기인데 수화물 도착장소만 한국어로 '시카고'라고 쓰인 표도 이제 보니 우습다. 귀신의 짓이군,



* 시간이 지나고 여행을 정리하면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보스턴과 시카고는 1시간의 시간 차가 있었다. 시차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작은 나라에서 살 던 사람인 루미씨는 한 나라에서도 시차가 클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군. 귀신의 짓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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