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향 민간인
2025년. 뜻하지 않은 일과 엮이는 경우가 몇 번 있었고, 이제 좀 편해지겠지 싶은 시점에 북향민 동무를 만났다.
이곳에 온 지 2년이 채 안 된 7월 말, 그동안은 인사도 안 받던 아랫집 중년여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탈북 13년 차인 그녀는 큰 일을 앞두고 유일한 가족인 반려견 맡길 사람을 찾던 중, 하똘이와 매일 산책하는 나를 눈여겨봐 둔 것이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오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동무의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
군인이었던 습성 그대로, 동무는 나에게 지시한다. 갑자기 전화해서 ‘밥 먹으러 가요.’ 나는 미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사람인데… 하지만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뒤따르는 말에 자동차 시동을 건다. 식당은? ‘내가 가자는 데로 가면 돼요.’ ‘식당명 알려줘요. 내비게이터 켜고 가게요.’ ‘내비 필요 없어요. 내가 가자는 대로 가면 돼요,’ 뭘 먹을지도, 이미 동무는 결정했다. ‘내가 이래 보여도 입이 청와대예요.’ 청와대 입이면 좋은가? 하면서도 나는 동무의 말에 따른다.
몇 번 미리 말해달라고 했지만, 동무는 민간인에게 뭔가를 상의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불편함을 내가 왜 한 달을 넘게 가지고 온 걸까? 우선 동무의 처지가 딱해서다. 무슨 일과 연루되어 재판을 앞두고 두려움과 후회로 흘리는 눈물에, 나는 내 딱한 처지를 잊게 되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타인의 불행에 관심을 가지는구나. 내 불행을 잊게 하는 최대의 처방은 타인의 불행이라더니. 나는 나의 얄팍한 심상으로 인해 스스로 올무에 걸린 것이다.
덜컥 동무의 반려견을 맡아 주겠다고 하곤 막상 D-day가 다가오자, 현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왜 당시의 내 상황을 인지하고 거절의 답을 주지 못했을까? 후회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나를 돌보는 것보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성숙하지 못한 ‘내’가 한 발 앞선 결과인 반려견 두 마리와 살아야 하는 날이 가까워지자 불안해졌다.
다행히 동무에게 다가온 큰 일은 생각보다 작은 일이 되는 듯, 나는 동무의 반려견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앙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으며, 동무에게 문자를 보냈다.
“ 그동안 고생했네요. 끝까지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요. 저도 나름 혼란스럽고 어려웠어요. 저는 여기에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왔거든요. 이제부턴 이전으로 돌아가서, 누구와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이사 갈 때까지, 조용히 있을 수 있었으면 해요. 우리 교회는 같이 갈 수 있지만, 북향민 교회에 내려 주지는 못할 듯해요. 시간이 촉박해서 일하러 가기 전에 밥 먹을 시간이 없더라구요. 이 점은 제가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해서 미안하구요. **씨가 이번 기회에 단단해지길, 행복해지길 바랄게요. ”
그리고 집을 보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