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쓸모 있는 or 몹쓸
**어린이집에 다시 가게 되었다. 7 – 8년 만에 다시 오니 너무 좋다. (꿈에서는 그 정도로 느꼈지만, 실제로 그곳을 떠난 지는 15 - 16년 정도 되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언니 그리고 다른 선생님이 한 명 더 같이 일하게 되었다. 보육실을 둘러보며 흡족함을 느낀다. 그런데 여긴 2층이고, 두 보육실이 유리가 달린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언니와 붙어있는 보육실을 사용하는 게 싫다. 1층으로 내려가니 교실이 하나 더 있고, 여긴 그 후에 근무한 @@어린이집의 2세 반 보육실이다. 난 이 공간이 마음에 든다. 다시 어린이집에서 일하게 되어 기쁘다. (11월 27일 꿈)
그동안의 꿈에선 나도 아이가 있는데, 누군가 아이를 맡기고 가거나,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이가 어깨에 매달려 끙끙거리는 등 아이들은 늘 내게 힘든, 달갑지 않은 존재로 나타났다. 오래간만 혹은 아마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아이들과 있는 것을 기쁘게 느끼는 꿈을 꾼 듯하다.
꿈에서 깨고 나서, 내가 그렇게 어린이집 일을 다시 하고 싶은지? 자문한다. 6 – 7년 전, 두 번째 어린이집을 그만두며 앞으로 어린이집엔 얼씬도 안 할 거라며 호기롭게 돌아서던 ‘나’는 누구였는지? 이제 와서 다시 하고 싶은, 또 기쁘기까지 한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보니 내가 쓸모 있게 느껴지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젊음, 패기 무엇보다 열정이 있었다. 뭐든 할 수 있고, 내가 하는 일에 확신도 있었던 때가 바로, 어린이집 근무를 하던 그때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실수도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으며, 무엇보다 '나'로서 살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하다.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글항아리. 2023)에서, 자살기도를 한 엄마에게 딸이 묻는다. “엄마, 대체 왜 그랬어요?” “ 내가 쓸모없게 느껴져서 그래.” (p313)
가족을 떠나 오롯이 나를 돌보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나는 그 몹쓸 ‘쓸모’를 생각한다. 생산적이지 않으면, 쓸모없으면 삶은 실망과 초라함뿐이라는 강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당근을 뒤지고, 보육교사 구인란을 살피며, 몇몇 곳에 지원서를 내곤 1963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나’와 마주한다. 제 아무리 이력에 금테를 둘렀어도, 1963에서 그대로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나’의 멋진 이력서.
돌이켜보면,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늦깎이 석사공부를 했는지... 요즘은 박사도 많아서 석사로는 강사도 어렵고 더군다나 60세 정년이라는 요건이 붙는다. 차라리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을 두고,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 철딱서니가 없다고 해야 하나 결국 ‘쓸모’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이 나라의 광기는 틈새를 허용하지 않지만, 나는 쓸모 있는과 몹쓸 사이 틈새를 찾는다. 간혹 70에 피트니스 상을 휩쓸고, 시니어 모델로 데뷔를 하는 등의 사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또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잖은 가?
나는? 나는 그 사이, 틈새, 공간 어딘가에서 휴대용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싶을 뿐이다.
꿈을 생각한다.
그런 날이, 그렇게 쓸모 있는 날이 다시 오려나 보다가 아닌, 이제는 ‘내’가 갖고 있는 인간의 '쓸모'에 대해 다른 인식을 하고 다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고, 꿈은 내게 경고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