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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한강, 2017. 문학동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치열하게 나를 찾는 여정

by Rumi


그들에게 잠시의 위안은 되었지만, 이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의선을 인영과 명윤은 ‘황곡’ ‘함* 중학교’라는 단서만 들고 찾아 나선다. 그들은 의선을 왜 찾아 나섰을까? 그들 스스로 혐오를 담아 뱉어낸 늙고 상처받고 가난한 그리고 온갖 검은 것들을 마주하지 않고는 온전한 ‘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섬뜩하리만치 어둡고 외롭고 슬픈 글로 희망을 품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는듯하다.

어느 날 인영의 삶에 들어선 한없이 나약하고 배려심 많은 의선을 인영은 마치 아이를 처음 입양해 키우는 젊은 여자 같은 자부심과 서투름으로 대하고 있다. 밝은 봄날의 햇빛을 맞으며 의선은 알몸으로 대학로를 질주한 후 첫 번째, 인영이 7년간 찍은 바다 사진을 태운 후 두 번째 사라진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의선은 명윤의 집을 나와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는 검은 사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깊은 땅속 암반 사이사이로 기어 다니며 사는 짐승이란다’(p474). 출생신고가 안되어,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통장도 만들 수 없는 의선은 유령처럼 부유하는 삶을 산다. 열세 살에 떠난 연골. 그녀보다 먼저 떠난 어머니. 그리고 엄마를 찾아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나는 아버지. 그녀는 조산으로 백치가 된 오빠의 파란 오리털 파카를 샀지만, 끝내 전해주지 못한다. 그동안의 애써 눌러온 열기가 폭발한 의선은 잘려 나간 기억을 더듬어 서울을 떠나 연골로 향하지만, 2년 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폐허가 된 마을과 집 뒤편 조그만 두 개의 봉분이 그녀를 맞이한다.

‘저 여자앨 보면, 늙고 상처받고 가난했던 날들이 한꺼번에 생각나. 모든 게 한꺼번에 생각난다구’(p338-339). 의선을 찾으러 황곡에 가는 것부터 명윤 때문에 왔다고 하던 인영은 고비마다 의선의 단서를 찾아낸다. 폐탄광사무실에서 찾은 스크랩북에서 의선의 아버지 임영석의 이름을 찾아내고, 버스 터미널에서 두 아낙의 대화 중 어둔리(현리), 연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등 인영은 의선을 늘 찾고 있었다.

‘의선은 그때까지 명윤이 보았던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 와도 같이 무기력했고, 섬약했고, 불가해했고, 무엇보다 선했다’(p174). ‘언젠가 꿈에서 의선은 다섯 살 배기쯤 되는 작은 몸으로 오므라들어 그의 팔에 안겨 있었다. 마치 막냇동생 명아처럼’(p175). 하지만 스러져 가는 폐광촌에서 의선을 찾을 수 없게 되며 “검은 땅, 검은 산, 검은 물, 모두 지겨워졌어요. 이제 정말 지쳤다구요.”(p368) 명윤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탄광과 얽힌 사건과 사람들에 대해 인영, 명윤, 의선 그리고 장이 화자가 되어 글을 끌어 나가는 5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으며, 정신은 또렷한데 왠지 꿈을 꾸는 듯하다. 꿈에 나오는 등장인물, 동물, 사물, 장소 등은 꿈을 꾼 자신의 일부라고 한 어느 상담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의선은 우리에게 있는 억압받고 소외된 자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을 일컬어 ‘막장’이란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막장(Blind end/Dead end)의 실제 의미는 지하 수십, 수백 미터에서 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석탄 가루를 마셔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던 탄광의 마지막 장소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들이 내딛는 여정 한가운데 폐허가 된 폐광촌을 두었고, 의선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며 잊힌 광부들의 삶을 전한다. 성실한 자료조사와 함께 산업화의 동력이 되었지만, 어두운 막장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그들의 애환을 작가는 마음을 다해 글에 꾹꾹 눌러 담았다. 거칠 것 없는 일필휘지의 날렵함이 아닌,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인 문장들로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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